엄마와 고추장수제비
엄마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고 나누는 이야기 주제가 있다. 바로 오늘 저녁은 뭘 먹는지, 요즘 뭘 해 먹고 사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때때로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지만, 사실은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이 모여 밥하기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서로 위로하는 시간이다. 가족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이 그만큼 고단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란 뜻이기도 하다.
올해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도 본격적으로 ‘돌밥돌밥(돌아서면 밥하고 돌아서면 밥하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삼시 세끼 차려내는 것도 고단하지만, 메뉴를 정하고 재료가 떨어지지 않게 장을 보는 것에도 많은 수고가 필요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홀로 온라인으로 장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하루가 밥으로 시작해 밥으로 끝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순간이면 나보다 어렸던 그 시절의 엄마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엄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겠구나 하면서. 방학이면 엄마와 나는 주로 단둘이 밥을 먹었다. 우리집 남자들은 늘 바빴기 때문이다. 해양경찰이던 아빠는 한번 배를 타고 나가면 일주일씩 집을 비웠고, 쉬는 날에도 모임들로 일정이 꽉 차 있었다. 놀기를 좋아하던 오빠는 아빠가 안 계신 날이면 덩달아 자유를 만끽하더니, 성인이 되어서는 출퇴근 시간을 핑계로 아예 독립해버렸다.
그러나 엄마는 군인이었던 아빠를 만나 의정부에서 부산으로 시집을 왔다. 친정 식구들도, 다니던 직장도, 오래 사귄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아빠의 근무지를 따라 부산과 제주를 여러 번 오가느라 동네 사람들과 정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엄마는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연스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엄마 곁을 줄곧 지킨 건 바로 나였다. 제주에 살 땐 친구들의 집이 너무 멀었고, 대학 다닐 땐 돈이 없었다. 우리 집에는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학생 때는 괜히 나가서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용돈을 아껴 써라’는 것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빠는 그때의 서러움 때문인지 내게 아르바이트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서 늘어난 시간을 마음껏 누릴 만큼 넉넉한 용돈이 주어지는 건 또 아니었다. 그런 내가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취미는 그저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외국 드라마를 다운 받아 보는 것이었다.
한창 드라마에 빠져 있으면 엄마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선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식성마저 닮은 엄마와 나는 밀가루 음식을 특히 좋아했다. 하루에 한 끼는 꼭 빵이나 면을 먹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 바로 고추장수제비였다. 비가 오거나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진 날이면 엄마는 일찍이 스텐볼을 꺼내 밀가루 반죽을 시작했다. 반죽을 냉장고에 몇 시간 넣어두면 수제비가 더욱 쫄깃해지기 때문이다.
서늘했던 집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 고추장수제비가 거의 다 되었단 뜻이다. 달그락달그락 수저 놓는 소리에 영상을 멈춰놓고 거실로 나가면, 김이 펄펄 나는 고추장수제비 한 그릇이 내 자리에 막 놓였다. 멸치 다시마 육수에 고추장을 풀어 빨갛게 끓여낸 국물에 잘 익은 감자와 애호박, 그리고 투박한 수제비 반죽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서둘러 칼칼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이 내겐 자연스러웠다.
요즘도 친정에서 엄마와 점심을 먹을 때면 나는 종종 고추장수제비를 이야기하곤 한다. 엄마는 여전히 내가 싫어하는 양파 대신에 감자와 애호박만을 넣고, 쫀득한 수제비를 위해 오래 치댄 반죽을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끓여낸 고추장수제비를 먹을 때면 엄마는 안방에서 트로트 방송을, 나는 방에서 드라마를 보던 장면이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때 엄마 곁에서 트로트를 같이 들어줄 걸, 수저 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나가 이야기라도 거들어줄 걸, 설거지라도 내가 할 걸, 하는 후회와 함께 말이다.
문득 우리 아이들은 어떤 음식으로 이 순간들을 기억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뜨겁게 끓여내던 미역국밥일까. 주말 아침이면 밥 대신 함께 먹던 감자전일까. 부디 나와 함께한 음식이 그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