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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Feb 10. 2022

[단편] 얕은 철학자 - 1

오늘 수명이 24시간 줄었다

남자는 잘 웃었다.

세상 좋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자는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수도 없을 만큼 그 모습이 좋았고 그 마음이 보일까 봐 눈알을 굴려야 했다.

그에 반해 남자는 무엇이든 여자에게서 먼저 거두는 법이 없었다.

먼저 시선을 거두는 것도, 입 맞출 때 먼저 멀어지지도, 길을 걸을 때 손을 놓는 것도 언제나 여자였다.


그런데 여자는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각자 할 일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 쪽을 보면 남자는 어딘가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어둡고 공허해서 여자는 또다시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내가 옆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있는 걸까 궁금했다.

언제든지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았다.


심심풀이로 사주풀이나 들어볼까 해서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재밌을 것 같으니 같이 가보자 제안한 건 여자였지만, 막상 크고 작은 불상들과 그 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빼곡히 들어선 점집 안을 들어서니 괜히 겁이 났다.

그래서 남자에게 먼저 점을 보면 안 되겠느냐 말했고 물론 남자는 그러겠다 했다.


남자의 생년월일을 말하자 무당이 눈을 감고 방울을 요란스레 흔들었다.

사십 대 중반 정도의 아주머니는 방안의 벽을 뚫고 나갈듯 카랑카랑하고 호기로운 목소리로 중얼중얼 하더니 방울을 내려놓았다.

‘허이고’

갑자기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자기, 그거 알아? 자기는 향이 나’


남자보다 여자가 무슨 말인가 궁금해서 '네?'하고 말하곤 황급히 '아'하고 입을 가렸다.


사람들이 자기 좋아하는 거 같다는 느낌 못 받았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지만 남자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스쳐 갔다


‘자기는 향이 나는 사람이야, 근데 그 향을 주위 사람들이 가까이서 맡고 싶어 해.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오는 거야. 자기, 자기가 매력 있는 거 알지?’

‘그런가’

남자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로 모르겠다 말했다. 그렇지만 정녕 모르겠다는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는 그때 무당의 말을 듣자마자 진짜 용하네 싶으면 서도 말을 살짝 정정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향이 나는 사람이라기보다 향 그 자체였다.

그와 있다 보면 재밌는 뭔가를 하지 않아도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모르고,

어디서 뿜어나오는 지 모를 편안함에 평소 같지 않게 나까지 풀어져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이 취하는 방법은 술뿐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사랑한다' 속삭여줄 땐 그 순간이 이미 지난 게 아쉬워져 녹음이라도 해둬야 하나 싶었다.


이제 막말을 배운 아이마냥 여자는 질문이 많았다.

그렇게 10가지를 물으면 남자는 12가지에 대해 답해주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평생을 물어도 남자를 절대 다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자가 와달라면 언제 어디서든 그래 몇 분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와줬지만,

일주일에 짧게라도 몇 번은 만나 수다를 떨다 헤어졌지만, 남자는 곧 사라질 사람 같았다.


비가 기분 나쁘게도 찔끔 찔끔 오는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있다 여자가 무심히 물었다.

'오빤 왜 살아?'


처음이었다. 남자가 그토록 길게 침묵한 것은.

'그러게. 죽을까?'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또 그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커피잔을 쥔 자기 오른손을 잠시 쳐다보다 말했다.

손이 유난히 예쁜 사람이었다.

둘이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 여자는 남자의 오른손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놀았다.

그러면 남자는 왜 그러냐 묻지도 않고 여자가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접었다, 펼쳤다 하도록 내버려 주었다


'아직은 보고 싶은 순간이 있어.'

'뭘?'

'그건 몰라. 근데 지금 죽으면 아쉽겠다 싶어'

'가고 싶은 곳 있어?'

'너 가고 싶은 곳'

'아니 그런 거 말고'

'지금은 아무 걱정 안 하고 쉬고 싶어. 그럼 어디든 상관없을 거 같아.'

'쓸쓸해?'

'응'

'나랑 있어도?'


남자는 말로는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안아줄 수도 없는 그 마음이 안구를 통해 보이는 듯했고,

그 크기가 너무나 커서 눈 밖을 튀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았을까.

여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꾸욱 또 꾸욱 눌러내며 물었다.


'나랑 있어도 그런 때가 있는 거지?'

'너랑 있어서 더 슬픈 거 같애'

'왜?'

'뭔가 하나 봐버린 느낌. 내가 보고 싶던 게 이거였나 싶은 느낌'

'그럼 살 이유가 줄어든 거야?'

'그런 셈이지.'


'내가 이유는 안 되는 거지?'

남자는 여자를 조금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두 손을 여자의 두 손에 맡겼다.

한여름의 정원 또는 오크 향 가득한 양주를 연상시키는 우디한 향이 났다.

여자는 처음 남자와 데이트 하던 날이 떠올랐다.

'아 잠깐만'이라며 전화를 받으려 팔을 한번 휘두르는데 신기한 향이 났다.

여자의 취향을 어찌 알았나 싶을 만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그 향을 맞는 순간, 여자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 자신의 앞날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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