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트 Feb 05. 2022

[단편] 어느 연인들의 대화

밤은 짧다

오후 9:30


여자는 이마에 왼쪽 손등을 얹고 눈을 감고 침대 왼편에 누워있다. 

오른팔은 침대 오른쪽으로 쭉 뻗어뒀다.

키가 158cm 남짓한 여자의 손끝 너머로 침대는 한참을 더 뻗어있다.


'왜 그러고 있어'

'오늘 일찍 자려고'

'그래? 그럼 나도 일찍 자야겠다.'


남자는 야근이 잦다. 퇴근 후에도 말이 퇴근이지, 일하는 장소가 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업무 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침실로 들어온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급히 치켜들어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컵을 한 손으로 다 두를 만큼 손이 크다.


184cm 큰 키의 남자는 수많은 인파가 지나는 길거리에서도 존재감이 돋보였다.

손에 들린 컵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프로도가 그려져 있다.

여자가 지난 기념일에 카카오 매장에서 산 커플컵이다.

남자는 프로도컵인지 네오컵인지 상관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잡아 물을 마셨고, 네오컵을 잡아 마시면 여자는 '이건 내꺼야'라며 프로도컵을 쥐여주곤 했다.


물을 다 마시고 여자의 쭉 뻗은 팔을 들어 올리며 남자가 침대 오른편에 눕는다.

남자는 여자의 오른팔을 살며시 자기 가슴팍에 올려둔다.

한겨울에도 집에서 반팔, 반바지를 고수하는 남자의 가슴팍은 놀랍도록 뜨겁다.



오후 9:40분


'넌 내가 왜 좋아?'

여자는 남자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묻는다.


'예뻐서'

'또?'

'똑똑해서'

'또?'

'착해'

'또?'

'잘해'

남자는 여자의 정수리에 입 맞추며 속삭인다.


'또?'


남자는 가슴팍에 있던 여자 손을 감싸 쥔다.

손안에 든 게 여자 손인지 메추리알인지 모르게 여유롭게 감싸든다. 

'무슨 일이야?'

'왜?'


남자가 이번엔 팔을 뻗어 여자의 몸을 감싼다. 아니, 이 정도면 덮었다고 봐야 한다.

'수현아, 내가 널 안 좋아하는 거 같애?'

'아니'

'그럼 왜 묻는 거야?'

'...'

'10가지건 100가지건 얘기해줄 수 있어. 오늘 다 못 말하면 내일마저 얘기해줄게'

'응'

'근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그럼?'

'나는 모르지. 한 번 생각해봐'


남자는 조금 힘을 줘 여자를 끌어안는다.

지금 여자의 세상은 남자의 품 그 작은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만가만 숨을 나누어 쉬며 오늘 하루를 되짚는다.

때론 크게 넓은 열린 공간보다 작고 어두운 닫힌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오후 9:50분


'아 병맛 과장새끼'

'어?'

남자는 갑작스러운 여자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아니, 부장이 주간보고 올릴 거 없느냐고 묻길래 정리해서 피드백 요청했는데'

'근데'

'과장새끼가 수현씨, 그건 저랑 먼저 얘기를 하셨어야죠 이러잖아.

아니 지가 툭하면 자리 비우고 없으니까 부장도 나한테 부탁한 건데, 지 일 대신 해준 건 줄도 모르고'

'그랬어? 과장새끼 나빴네'


여자는 잠이 슬슬 깼다.



오후 10:00분


'아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여자는 남자를 살짝 밀쳐내고 활짝 웃는다. 


'기분이 좀 풀렸어?'

남자말에 여자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진다.


'내가 귀찮게 했네.'

여자는 엄한 사람에게서 인정 욕구를 채우려 했나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든지 물어도 돼. 근데 내가 뭐라 대답해도 너 기분이 좋아지질 않잖아.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고'

'...'

'미안해, 내가 생각은 못 읽어. 그러니까 네가 알려줘'

여자는 안다.

남자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여자는 괜히 부끄러워 다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알았어'

'그래, 그럼 잘까?'


여자가 협탁위 스탠드 불을 껐다

'아니, 진짜 자자는게 아니라...'

'안잘거야'

작가의 이전글 우울한데 더 우울하고 싶으신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