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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Jan 31. 2022

우울한데 더 우울하고 싶으신가요

영화리뷰 : Detachement

영화 리뷰지만 줄거리나 결말에 크게 관심 없으신 분께 권합니다.


서류 - 폰스크링 인터뷰 - 과제 테스트 - 과제면접 - 면접

지난 얼마간 내 의식의 한켠에서 내 마음을 졸이게 만들던 채용절차가 드디어 끝났다.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리쿠르터와의 마지막 통화가 끝나고 나서 육성으로 '아, XX'이라는 말이 나와버렸다. 평소 욕을 내뱉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일단 내 입에서 욕이 나오면 한 뼘 정도 떨어진 내 귀로 들어가기 때문에 귀를 씻긴 귀찮고 나라도 내 귀를 더럽히지는 말자는 생각에서다. 욕은 감정의 배설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절차상에 불만은 없었지만 미흡했던 과정이 떠올라 아쉬움과 절망감과 무기력함이 한 번에 밀려오는데 딱히 떠오르는 다른 단어가 없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부터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내 기분의 함수는 밑이 0 < a < 1인 지수함수의 형태로 나를 추락시켰고, 그 하강 곡선을 따라가며 추스를 틈이 없던 나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몸이 녹아내린다. 중력이 점점 크게 작용해 머리끝부터 발가락끝까지 나를 바닥으로 잡아당긴다. 그 압박감에 저항할 의지마저 꺾여 눈꺼풀을 감게 된다.


뭐라도 보면 나아질까 싶어 왓챠플레이를 키고 영화를 찾아봤다. 끝없이 나열된 영화 리스트를 보며 리모콘의 오른쪽 방향키를 누른다. 이 많은 카테고리와 영화 중에 탁하니 마음을 사로잡는 게 없어 결국 그 긴 리스트의 끝까지 와버렸다. 결국 나의 예상 평점이 4.0인 영화 아무거나 보자 마음먹고 다시 리스트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4.0이 넘는 영화도 있었지만 어쩐지 못 미더워 몇 편을 더 넘기다 이러다 또 끝까지 가겠구나 싶어 딱 예상 평점 4.0인 영화에서 멈췄다. 액션이나 코미디물을 보고 싶었는데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대한 영화는 아니겠구나 직감했다. (영화 제목에서부터 느꼈을 수 있지만)

Detachment 사전적 의미 : 1. 무심함, 거리둠 2. 객관성, 공평성 3. 파견대 4. 분리

영화는 정규직 교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한 달간 문제아 학교로 온 대리 교사의 이야기다. 영화 전반에 걸쳐 우울함과 아슬아슬한 분노가 강아지풀마냥 마음을 간지럽힌다. 주인공은 가당찮은 학생의 도발에도 표정과 톤하나 변하지 않고 대처한다. 요즘 말로 멘탈갑인 사람 같지만 지독한 자기 우울이 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온몸에서 그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게 캐릭터인 캐릭터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설정이다. 보통 그 설정이 너무 설정 같아 몰입이 안 되는데 이 영화에서 에드리언 브로디는 눈빛과 손짓과 톤에서 아주 잘 녹여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장면은 아니고, 취향입니다.

영화는 공감할만한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평소면 그런 대사는 기록해두려 했을 텐데 이번엔 그냥 흘려보냈다. 그냥 그런 대사가 많았던 것만 기억한다.


모두에게 그런 순간이 있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각자만의 문제를 온전히 홀로 소화해내야 하는 순간. 자기만의 불안과 실망감과 허무함을 그저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 영화는 각 인물의 '그 순간'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단순히 우울하다 무기력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위로의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참담한 순간이다. 슬픈 건 그 순간들이 정확히 우리의 삶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어디 서양권 교사들의 노고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학생이라면, 사회인이라면,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여자라면, 남자라면, 인간이라면 느끼게 되는 암울한 순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왜 배워야 하는가.

'이 되도 않는 세상에서 내 생각을 지켜내기 위해서'


주인공은 지키고 싶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돼버린 이들의 자식이었던 본인을, 그런 상황을 겪고 있을 학생들을.


영화지만 억지 설정으로 과한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돋보이는 OST나 감각적 미장센도 없다. 그래서 보기 편하고 불편하다. 마음 한켠에선 영화에서만큼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란 말이야!라고 소리친다. 영화 후반부 즈음에는 감정적으로 녹아내린 몸이 세상과의 경계가 무뎌져 실체가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영화에, 우울한 나의 감정에 더 빠져있게 된다. 영화는 (최소한 나에게는)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모르게 끝난다. 그게 일상이다. 해피엔딩, 새드엔딩 그렇게 단정적으로 끝나는 하루는 잘 없다. 아, 물론 나의 근황은 계속 새드이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우울한데 더 우울해지고 싶은 분

조용하고 구름낀 날씨같은 영화 찾는 분

세보이지만 사연 있어 보이고, 차분하지만 불안한, 수트 잘 어울리는 캐릭터 좋아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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