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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Sep 26. 2021

아버지의 장례식 - 2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상을 치르게 된 입장에서 가장 난감했던 건 장례식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미리 생각해둔 장례식장은 있었지만 바로 식장으로 연락하면 되는지, 장례식장 음식들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들은 어디로 연락해야 요청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이런 건 상조회사에 바로 연락하면 되나, 일단 장례식장에 전화해볼까, 나는 장례식장에서 자는 건가, 그럼 짐은 얼마나 싸야 하나 너무 많은 생각이 몰려와 오히려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상주가 되어버린 남동생도 비슷한 고민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천만다행히 회사에 조사 시, 조의 용품을 신청할 수 있는 복지혜택이 있어 이를 신청하는 것으로 일의 시작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장례절차를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장례지도사가 있어 그 분의 리드에 따라 하나하나씩 결정하면 되었다. 내가 할 건 안내된 여러 옵션 중 적절한 서비스와 금액대 상품을 선택하는 것.


장례지도사에 대해서도 직업적으로 장례를 대하시는 분일 것이란 생각에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매 순간 조심스럽게 말을 하시면서 가족들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삼아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간소히 하고 싶으나 형식없이 하기가 더 어려운 대소사를 치뤄야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담당 지도사분은 나와 대화 중 시선을 전혀 맞추지 않으며 말을 하셨는데 개인적인 습관일까, 일종의 직업병일까 궁금했다. 시선 마주치며 대화하길 좋아하는 나는 이래저래 고개를 살짝씩 갸우뚱거리며 대화를 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칠 뿐 계속 시선이 어긋나자 불편하신가 싶어 그만두었다.)


차림이란 게 그렇듯, 할 거 다하자면 끝도 없는 절차와 형식이 존재했다. 장례 중에도 제사를 몇 번 지내고 발인 후 묘에 가서도 OO제라는 이름으로 여러 제사를 치뤄야 했다. 망자가 가는 길에 조금의 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 마음이겠지만, 이렇게까지 한다고?라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이보다 난감한 건 부고 소식을 어디까지 전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는 가까운 친구들과 직장 상사분들이야 진작 연락을 했지만, 연락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선뜻 염치없다는 미안함 마음이 먼저 드는 관계였다. 모름지기 경조사는 일단 알리고 보는 것이라 했지만,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 이런 소식이면 상대방도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럼 미리 만들어둔 부고 문자에 계좌번호만 지우고 보내야 하나, 지금 이런 것까지 고려할 상황이 아니니 그대로 보내야 하나 한참을 갈팡질팡했다.


결국 나는 정말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연락하는 쪽을 택했다. 머릿속에서 '나는 이 사람 조사에는 갈 텐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가도 '그래도 부담스럽겠지?'라는 생각에 들면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휑하든 말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코로나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부의금 몇십 또는 몇백만 원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소식을 듣고 내게 5만 원을 보낼까, 10만 원을 보낼까 고민할 상대방을 생각하면 일어나는 저울질 당하는 두려움과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나의 자존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고민 없이 연락을 하지 않는 관계들이 차라리 편리했다.




나는 상을 당한 사람들은 휴대폰 볼 겨를도 없이 바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론 정신이 없지만, 그 와중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이 휴대폰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3일장을 치르는 동안 이래저래 배려를 받게 되는 상주는 생각외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시간이 많았다.

물론 이는 나의 경우, 오전 일찍부터 장례를 준비해 똑같은 3일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괜찮느냐며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아주는 사람들이 더욱 고마웠다. 내가 반대 입장일땐 바쁘겠지 싶어 돈만 보내고 별도로 연락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앞으로는 문자든 전화든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장례 1일 차에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담담하게 업무 수행하듯, 일을 진행하고 받아들이게 될지 몰랐다. 물론 내가 울면 어머니와 동생이 더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울지 말자 다짐한 것도 있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상복은 입은 나는 훨씬 담담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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