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트 Oct 03. 2021

아버지의 장례식 - 3

죽음으로 알려주는 삶의 교훈

장례식 첫날은 상복을 입고 어찌 하루가 간지 모르게 하루가 지나갔다.

아, 상중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저녁에는 웃을 일들이 있었다. 인천, 서울, 용인, 평택, 화성, 대구 여러 지역에서 모인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 줬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부고 소식을 얘기했던 친구들.


삼삼오오 모여 온 친구들 얼굴을 보는 순간 잠깐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각자 거주하는 지역도, 하는 일도 다르니 모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동창회 비스름하게 돼버린 자리에서 친구들은 위로의 말과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 내 남동생을 보고 '야 난 네가 벌크업 한 줄 알았다'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웃어버렸다. 오랜 시간을 공유한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바로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상주실'이라는 빈소 바로 옆 쪽방에서 잠이 들었다. 머리 바싹 말리기에 약간의 집착이 있는 내가 드라이기를 챙긴 건 천만다행이었다. 잠잘 공간이 있으니 최소한의 이부자리도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목침 하나 없었다. 다행히 회사에서 지원된 조의 용품에 간이용 베개가 있었고 고스톱 깔개보다 얇은 체크무늬 담요가 한 장에 만 원씩 장례식장 물품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자선단체가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너무 남겨 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1-2만 원 아끼려 귀한 수면시간을 추위에 떠느라 허비할 수 없었기에 3장 구매했다. 나 같은 생각으로 계속 구매해주니 이 가격을 유지하는 거겠지.



2일 차 오전은 한산했다. 월요일이라 올 사람들은 대게 저녁에 올참이었고 최소한의 친척들이 빈소를 지켰다. 첫날 저녁으로 먹은 장례식장 음식들은 2일 차 아침, 입을 대자마자 물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도록 어제와 똑같이 유지되는 맛과 음식의 온도가 사람을 금방 질리게 했다. 차라리 맥주 안주용으로 있는 김가루 같은 게 붙은 짜리몽땅한 과자와 달달한 말린 바나나칩이 더 손이 갔다. 나의 소울푸드인 경상도식 소고기뭇국이 있었지만, 집에서 먹던 고기 듬뿍 콩나물 팍팍 넣어 많든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안 나는 미지근한 국물은 내 소울을 자극할 수 없었다.


오전에는 아버지의 입관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시간.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대면할 순간.

막상 정갈히 씻겨지고 옷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시신을 본 순간 약간 안도가 되었다. 콧속과 입안에 박힌 흰 솜들이 사체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멀끔하신 모습에 내가 막연히 너무 두려워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장례지도사분이 아버지의 시신에 손을 대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셨다. 이건 예상치 못 했다. 아버지라지만 시체에 손을 대게 할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왼손은 아버지의 머리에, 오른손은 아버지의 가슴팍에 올리고 편히 가시라는 말을 했다. 가슴팍 위에 있는 오른손은 옷고름들 위까지 전해지는 한기 때문에 차마 손을 푹 내려놓지 못했다. 아버지의 살이 직접 닿은 왼손은 그 차가움에 손을 떨릴 것만 같았다. '시체는 진짜 과학실 인체 모형 같아'라고 언뜻 들은 기억은 있지만 이를 눈으로, 손으로 실감하니 손가락을 어찌 둬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약간 짜증이 몰려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야. 사람은 뼈와 살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명(命)이란 정말 끈질기다 싶다가도 한순간인 거야. 라고 누군가 손끝과 손바닥에서 내 체온을 앗아가며 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망자가 가는 길이 기니 힘내 가시라고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시간도 있었다. 내 동생은 두 팔에 힘을 실어 꾹꾹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반대편에 있던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난 도저히 그 차디찬 다리와 그를 감싼 옷을 손에 꼭 쥘 수 없었다. 충분히 차고 시렸다.

아빠, 딸내미 손에 힘이 좀 없었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 순간 그게 저의 온 힘이었어요.


아버지를 입관하고 가족과 친지들 한 명씩 절을 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린 순간이. 첫 번째 절은 하래서 했고, 두 번째 절에서는 마지막 말을 하느라 최대한 천천히 일어났다. '아빠, 이제 정말 가셨네요. 진짜 편히 가세요. 모르겠어요, 살면서 아빠한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죄송하고 편히 쉬세요' 속으로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렸다.


나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들이 눈물을 눈에서 똑똑 방울 채로 떨어뜨리는 게 신기했다. 볼을 타고 흐르지도 않고 낙하해버리는 눈물방울. 내가 그걸 흘리고 있었다. 차마 애교살을 타넘기도 전에 덩어리가 커져 툭 떨어져 버리는 방울은 하나인지 둘인지도 모르게 후드둑 떨어졌다. 아, 안 울 거라고 다짐했는데. 죽음이 모든 걸 용서시키고 화해시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미 없어지는 순간, 나는 그저 울었다.


우는 건 중요하다. 슬픔을 흘려보낼 때는 정말 무언가 내보내야 한다. 속으로 되뇌는 생각은 약간 부족함이 있다. 울든 태우든 말을 하든 글을 쓰든 행위적으로 표출해야 한다. 그리고 입관식은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옆구리를 찔러준 좋은 기폭제였다.



중간중간 빈소에 향이 꺼지지 않게 지켜보고 있던 오후, 아직 누군가 오기엔 이르다고 생각할 시점에 방문해준 이들이 있었다. 직장은 서울, 장례식장은 대구, 코로나 시국. 회사 사람들이 오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도 무리해서 사람들을 부를 생각이 없었는데 기어이 와주신 분들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방문해준 사람들을 보면 당황스러움, 고마움, 미안함,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남에서 오는 반가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순간 나는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전에 내가 이들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어떤 거리감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지금이 코시국인 뭔지 다 모르겠고 그냥 고맙고 반가웠다. 내 상태를 걱정하시며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레 말을 건네시는 상대의 눈빛에 마음이 한 번 더 사르르 녹아 오히려 웃음으로 응대하게 되었다.

위로가 다른 게 아니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이가 있다는 그 사실. 그것만으로 내 모든 아픔이 위로되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생각이 들었다. 조사(弔事)는 가야겠다. 어지간하면 직접 찾아뵙고 위로해주자, 상대가 오지 말아라 하더라도.


저녁이 될수록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대부분 남동생 쪽 사람들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잘 마시는 동생의 인간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같은 배에서 나온 남매인데 이렇게나 다르다. 친한 형,누나도 친구도 아는 동생도 많아 많은 지인들이 찾아왔다.

아직 상주가 되기엔 이른 20대 후반인 동생이다. 찾아와준 친구 중에도 아직 이런 곳에서의 절차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본인들은 실례 같아 죄송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깟 향을 피우고 절을 해야하는 건지, 절을 어느 방향으로 하는지 하는 절차 뭐가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이렇게 시간내 와준 것에 너무나 감사할 뿐. 나보다 어리지만 이런 장례식장에 혼자 가기 두려워했던 나보다 더 의젓한 모습에 고개가 숙여질 뿐.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동생 친구가 있다. 빈소에 들어서면서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더니 절을 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가자마자 나와 어머니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솔직히 잠깐 웃었다. '엄마, 쟤는 저래 맘이 여려서 우짜노' 엄마는 동감한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웃으셨다. 그 눈물이 고맙고 귀여웠다.


나도 동생 지인들을 이렇게 많이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동생의 특징이 있다. 동생은 자기는 모르겠지만 친구/형들의 경계가 있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순둥순둥. 얼굴에 나 착함이라고 쓰인 사람들이었다. 반면 형들은 동생이 '누나, 나랑 친한 형들'라고 소개해주기도 전에 형이구나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동생보다 키나 몸집이 훨씬 크거나 인상이 훨씬 강해 동생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나중에 진지하게 동생에게 물어볼 참이다. 사람을 사귈 때 뭔가 기준이 있는 것이냐고.



흔히 힘든 일 겪으면 주위 인간관계가 한 번 확 정리된다는데, 부모상(喪)은 내 인간관계를 확 정리할 정도의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일임은 확실하다. 솔직히 '아 인사치레라도 오지 못해 미안하다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예상치 못한 진지한 위로에 마음이 잘 익힌 핫케이크 뒤집을 때처럼 폭닥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곱씹어 볼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위로는 만나서 해주자. 나는 말주변도 글재주도 없으니 그 정도 해보자.


인간관계에 회의감도, 의도적인 거리감도 두지 말되 큰 기대도 하지 말자. 그러니 내게 달려와 준 이들에 대한 감사함은 더더욱 잊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살면서 괴로울 일들이 더 있겠지만 조금은 편하게 생각하자. 난 죽는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좋든 힘들듯 끝은 있으니 조금 더 현재를 즐기고 솔직해지자.


내 가까이 있다고 내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를 꽉 쥐려 하지 말자. 조금 풀어놓고 갈 것들은 가게 두고 남을 것들은 남게 두자. 그리고 내 곁을 지켜주는 이는 소중히 하자. 어차피 만인의 사랑을 바라지도 가질 수도 없으니 내 손과 시선이 닿는 곳에 조금 더 온기를 실어주자.



To. 아빠

아빠(항상 존댓말을 썼지만 아버지라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편지에 하고 싶은 말들은 써서 관에 넣어뒀으니 더 많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장례식장에서 느낀 바는 부모로서, 목숨으로 알려준 삶의 지혜라 생각하며 깊이 새기며 살겠습니다.


장례식 2일 차는 이렇게 지나갔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장례식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