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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Oct 04. 2021

아버지의 장례식 - 4(마지막)

슬픔을 짧게, 애도는 길게

장례식 2일 차 밤은 조금 더 정신없었다. 오시는 손님도 많았고, 다음날 관을 들어줄 동생의 6명의 친구가 밤새 술을 마실 요량으로 식사 테이블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 한잔 적시고 있었다. 반대편 '기도실'이라 쓰인 방에는 동생, 오빠의 발인을 위해 모인 친척분들이 모여 서로 말을 이었다 쉬었다 하며 밤을 지새우고 계셨다. 나와 어머니는 빈소 옆 상주실 문을 열어두어 아버지의 영정 사진이 보이게 두고 쉬고 있었다.



삼일장의 마지막 날 아침은 조용하되 다들 약간은 예민한 상태였다. 3일 차쯤엔 빈소내 모두가 체력적으로 지쳐있다. 게다가 이동하며 진행될 남은 장례절차를 일정에 맞게 소화하기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장례지도사분이 여러 번 일정을 각인시켜주시고 수시로 체크해주셨기에 틀어질 일이 있으려나 싶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전에 아버지에게 제사상이 올라갔다. 제사를 지내는 중 곡을 하는 순간도 있었다. 옛날이야 손님이 방문해 절을 올릴 때마다 상주가 옆에서 곡을 했다지만, 요새 장례식장에서는 곡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차상, 아버지에게 가족들의 슬픔을 전하기 위해 곡을 해야 했다. 상주인 동생이 제사상 앞, 나는 제사상의 왼쪽 가장 앞자리, 그 뒤로 나머지 친지들이 각자의 자리에 서서 절을 올렸다. 모두가 절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지도사분의 구령에 맞춰 곡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모든 절차를 알고 있었다는 듯 큰소리로 곡을 했다. 그렇다. 상주는 매순간 가장 의젓해야 하지만, 곡을 할 땐 모든 소리를 리드할 정도로 크게 울음을 토해야 했다. 나의 몫까지 동생이 어깨에 떠안고 있는 것 같아 동생이 안쓰러웠다.


'내가 누나가 아닌 형이었으면'


장례식장에서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화장터로 이동할 때가 왔다. 나는 영정사진을 들 수 없었다. 원칙적으로 영정사진은 동생의 아들인 손주나 나의 남편인 사위가 들어야 했다. 나와 동생은 아직 미혼이었기에 사촌오빠가 영정사진을 들었다.


'형이 아니면 결혼이라도 빨리 했어야 했나'


영정사진 뒤로 나와 동생이 나란히 서서 아버지 관이 실릴 리무진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행렬의 저 뒤에서 걸어오셨다.

나는 제사든 이동할 때든 항상 배우자를 가장 가까이에 세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빈소에서든 어디서든 자식들이 가장 가까이에 있고, 아내는 친지들보다도 뒤에 서 있거나 제사 중에도 가장 마지막에 술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태어나서 한 가정을 이루기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배우자. 그의 슬픔이 가장 클 걸 알고 맨 마지막으로 순서를 미뤄준 것일까.


화장터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았다. 생각보다 매우 시스템화된 곳이었다. 경찰서에서 길목 실시간 모니터링 용도로 쓸법한 작은 모니터들이 바둑판 배열로 나열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 서로 다른 숫자가 쓰여 있었다.

'화장'이라는 공통된 용건을 위해 모인 각 무리의 장례 지도사들은 화장이 끝나면 일가족들을 모니터 앞으로 불러 'O번 모니터 봐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윽고 화면에서 두 명의 아저씨가 점잖지만 신속하고 절도있게 유골 가루를 함에 담는 모습이 나왔다. 이런 디지털화된 공간에서 슬픔을 느끼는건 여간 쉽지 않다.


아버지를 실은 관에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는 차례에서 어머니는 오열하셨다. 가족들이 마지막 말을 하기 전 먼 길 가시는 데 여비를 챙겨드린다며 웬 종이를 관 위로 스륵스륵 쓸어주는 순서가 있었다. 역시 상주인 동생이 해야 할 일이었다. 무어라 외치면서 관을 쓸었는데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후에 물어보니 동생은 그 순간이 장례중 가장 울컥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는 동안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왔고 차고 장례식장 음식보다도 훨씬 맛없는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화장터에서 먹는 뻣뻣한 함박 스테이크는 정말 추천할 것이 못 된다. 그냥 편의점에서 아무 도시락 사 와서 데워주는 게 맛도 가격도 좋겠다 싶지만, 그 순간 가성비와 맛을 따지며 도시락 가격을 운운할 사람은 없다. 이러니 이 가격에 팔리지.


아버지의 화장 시간은 예상 시간보다 길었다. 지도사분 말로는 생전 풍채가 좀 있으셨던 경우에 화장 시간이 더 걸린다 하셨다. 운동을 좋아하던 분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 나는 남자들은 다 운동을 좋아하거나 의식적으로 꾸준히 하는 줄 알았다. 여중생이던 나에게도 방학이 되면 헬스장 가라고 독촉을 하셨다. 요즘이야 이상할 게 있냐 싶지만, 나때만 해도 방학에 헬스장 간다고 하면 '여자가 헬스? 그것도 중학생이?'라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피티를 시켜주진 않으셔서 헬스장에서 혼자 이 기구 저 기구 기웃거렸다. 그러면 트레이너분들이 진짜 혼자 온 거냐고 신기해하시며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 알려주셨다.

그런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엔 온몸의 살과 근육이 빠지셨는데 그래도 그 체구가 어디 가진 않으셨나 보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되셨다.



그리고 유골함을 묻을 선산으로 향했다. 선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잠시 잠을 잤다. 졸린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조용한 버스가 요람처럼 위아래로 나를 살살 흔들어 대니 금세 잠에 빠졌다. 선산은 조용했다. 평일 시골 산이 얼마나 적막하겠는가. 비가 온다는 예보에 온 가족이 걱정이었지만 구름만 낄 뿐 비가 오지는 않았다. 눈이 시려 햇볕을 잘 못 쬐는 어머니에게는 최상의 날씨였다. 어머니는 연신 '마누라 햇빛 못 보는 거 알고 이렇게 도와주네' 말을 되뇌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부란 무엇인가 싶었다. 깨가 쏟아지는 금슬을 자랑하진 않으셨음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병간호하는 정신적, 체력적으로 극한인 상황도 꿋꿋이 이겨내셨다. 오히려 내게 종종 '니 아빠 집에 안 들어온다 생각하면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것도 싫다. 일 있어서 안 들어오는 거랑 영 안 들어온다 생각하는 거랑 마음이 다르다' 라며 아버지가 없을 상황을 염려하셨다. 아버지는 한사코 다정한 남편은 아니셨다. 취향은 바뀌어도 절대 변치 않는 내 일생의 이상형이 있다면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에서 온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선산에 아버지 자리를 파고 유골함을 묻고 다시 제사상이 올라갔다. 이곳에선 장례지도사분이 아닌 사전에 얘기된 다른 분이 제사를 도와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를 보시더니 '나보다 한 살 많으시네. 아니 뭐가 바빠서 딸내미 식장 들어갈 때 손도 안 잡아 주고 가셨나.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다 못하신 거야'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말에 악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장례식 내내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다. 몇몇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은 나를 보면 '아니 한 명은 치우고 가셔야지'라고 중얼거리셨다. 내가 무슨 분리수거 용품도 아니고 뭘 그리 치우길 바라시나 싶기도 했지만, 그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 또한 알았기에 나는 '아 네에...'라고 고개를 떨구는 거로 대답과 동시에 대화를 끝냈다.


동생, 나, 일부 친지, 어머니 순으로 아버지에게 술을 올렸다. 술을 따르거나 중간중간 동생 외에 남자 한 명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 역시 내가 형이었어야 했는데'


사촌오빠나 다른 친지들이 빈자리를 채워주긴 했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내 모습에 속상함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술을 올리고 절을 올리는 순간 또 한 번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구름 낀 어느 날 산기슭에서 재가 되어버린 아버지에게 술을 올리는 딸내미는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고 나니 마음이 잠깐 후련해졌다. 이제 더 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를 마치고 온 가족들이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진짜 끝났다. 고모네가 우리 가족을 집에 데려다주셨다. 작은고모는 옛날에는 장례 한 번 치르면 5일 내내 씻지도 못하고 사람 몰골 같지도 않았다며 이번엔 날씨도 도와주고 수월하게 일을 치렀다 말하셨다. 맞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셔서도 몇 번이고 장례가 막힘없이 진행돼서 천만다행이라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은 곳에 가셨나 보다며 마음의 위안으로 삼으셨다.



장례 이후로 지금까지 아직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적은 없다. 작년에 아버지를 보내신 직장 상사분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슬픔이 몰려올 날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슬픔은 짧게 느끼고 마음으로 애도는 오래 해드리라고 하셨다.

두 번 다시 없을 아버지의 장례식을 오래 애도할 수 있게 하루하루 기억나는 대로 써보았다. 정말 한없이 엄하고 고지식한 분이셨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가게 되어 망연자실한 딸에게 본인의 공부 잘하던 친구도 내가 간 대학에는 못 갔다 말해주시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그랬다. '속상하제 괜찮다. 대학이 다가? 앞으로 더 잘살 수 있다 수고했다' 그런 말은 죽어도 못하셨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어떤 실망감과 안타까움 없이 순수한 걱정을 해준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내게 시계를 읽는 법을 알려준 것도 아버지였다.


앞으로 힘든 날은 계속 올 것이다. 이제 나를 위로해줄 아버지는 없다. 어린 시절 잠든 나를 번쩍 들어올려 이부자리에 올려두시던 아버지는 땅에 고히 묻히셨다. 나와 아버지와의 인연은 끝났다. 생전 잘해드린 것도 없지만 누군가 내게 물었듯 '후회되니?'라고 물어온다면 글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고 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싶다. 그저 아버지의 삶의 의미가 최소한 아버지로서 무의미하지 않도록 잘살아 보겠노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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