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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 Oct 19. 2021

생계형 개발자입니다

어느 우울한 날의 독백

내 대학전공은 컴퓨터과학, 현재 직업은 개발자다. 대학 시절 중도(중앙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과제를 했고 힘들지만 코딩하는 재미를 느껴 이후 소프트웨어 개발직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개발직이 멋있다고 생각했었기에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거기엔 성비가 남자에 치우쳐진 직업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살짝이라도 주류에 벗어난 선택을 하면 더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 같은, 그래서 그런 선택을 한 내가 더 사랑스러워 자아도취 하기에 좋다.


외국계 회사에서 인턴도 해보고 작은 회사에서도 일해보고 지금은 나름 대기업에 속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이 되었다. 여전히 개발자는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고 이점이 좋다. 프로그래머 하면 사람들이 부스스한 머리에 뿔테안경을 쓰고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외골수 같은 이미지조차 좋아하기에 여전히 나의 일에 감사하다. 그렇다고 그런 이미지를 나에게 적용하진 않는다.

나는 개발자답지 않은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내 분야에 전문성을 지니되, 글도 책도 좋아하고 관심사도 광범위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마디로  문, 이과생의 장점을 온전히 통합 시켜 놓아 한눈에 가늠이 안 되는 다채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사회 첫걸음은 개발자지만 앞으로 최소 2가지 직업을 더 가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산다.


그런데 요새는 어느 쪽도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회사에서 맡은 업무도 내 적성에 맞는 건가 의구심이 들고, 그래도 맡은 일은 잘 해내고 싶은데 그마저도 속도가 너무 더디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개발자로서 업무를 그만둘 날이 오겠지만 그때는 박수칠때 떠나는 자의 모습으로였지, 실력 없이 월급루팡만 하다 제 살길 찾아 떠나는 모습은 아니고 싶다.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럼 이직하면 되지! 요새 개발자들 처우 잘 받아 가며 이직 잘한다던데? 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것도 쉽지 않다. 나는 개발업무를 좋아라했지 잘하는 편은 아니다. 개발 잘하는 사람들이 한마디로 눈에 탁 튄다.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초, 중등시절부터 프로그래밍을 팠던 사람, 대학 와서 이래저래 공모전이나 경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그냥 머리가 좋아서 로직을 빠르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쪽이다. 그렇다고 집에 와서 내 개인 시간에 IT기술에 대해 파고들만큼 이 업에 빠져있지는 않다. 내게는 재밌는 것들이 많다.

사실 내 관심사에 더 맞는 개발 분야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할 기회를 몇 번 두드려봤었다. 그런데 꽤 절차가 진행됐다가도 떨어지고 떨어지는 경험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똑 떨어졌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여러 일이 겹치면서 요새는 진이 다 빠진 느낌이 든다. 여러 일정이 겹칠땐 정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내서 면접을 보곤 했는데 다 부질없는 일이 되니 허무한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왜 더 잘 준비하지 못했을까, 내가 덜 절실했나, 더 열심히 준비했어야 하는 데라는 생각들이 후유증처럼 남아 지속적으로 나의 기를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실리콘밸리의 재기발랄한 개발자를 꿈꾸던 때도 있었지만 요새 나는 오롯이 생계형 개발자다. 여전히 개발은 좋지만, 과연 이 길이 내가 계속 가야 할 길인가,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이다. 짝사랑하는 상대랑 이어질 기미가 안 보이니 그냥 마음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는 마음 같다. 내가 이 분야로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최소한의 실력이 있다는 바를 확인하고 싶다. 이직 성공만이 그 방법은 아니다. 현재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 해낸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퇴근 후 집에서 쉬는 순간에도 마음이 끝없이 침잠한다.


오늘은 늦은 시간 빨래를 돌렸다. 평소 같으면 옆집이나 아랫집에 폐가 될까 밤에 세탁기 돌리는 건 피했겠지만 정말 오늘만큼은 남의 기분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집이라도 깨끗이 청소해야 내가 덜 쓸모없을 것 같은 기분에 드럼세탁기를 '스피드 모드'로 돌렸다. 빨래방에서 건조해 온 빨랫감에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글은 정보전달을 하든 교훈을 주든 감정정화든 읽는 이에게 효용을 주어야 하지만 오늘은 글을 쓰는 것조차 오로지 나만 생각하며 주절주절 썼다. 혹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오늘 조금 서툴러도

그것이 내일도 다음 주도 내년도 내가 서툴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아직은 포기하지 말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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