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6시까지 충전을 완료할까요?

쉬지 않고 일만 하는 당신에게

by 옆집여동생

나는 앱등이는 아니지만 몇 가지 애플 디바이스를 쓰면서 가끔씩 섬세한 UX에 감동을 선사받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최적화된 배터리 충전이다. 급속한 배터리 노화를 막기 위해 일상적인 충전 패턴을 학습해서 배터리 잔량이 80%를 넘어가면 ‘6시까지 충전을 완료할까요?’와 같이 충전을 천천히 하도록 먼저 제안해 주는 기능이다. 완충 시간 기준은 기존 충전 시작 및 종료 시간, 기상 알람이나 수면 사이클을 활용한다고 한다.


모든 일에는 속도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속도라는 게 항상 빠르기만 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속도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근지구력이기 때문이다. 핸드폰 배터리를 계속 100%로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배터리를 빨리 닳게 만드는 것처럼, 너무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더욱 빨리 소진하게 만든다.


적절히 눈치껏 일하고 월루하는 사람에게는 번아웃이 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일하자는 것은 아니다.)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고 인정도 받기 시작하는 시기인 대리, 선임급의 후배들 중에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후배들을 종종 본다. 일을 잘하고 능동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으레 일이 더 몰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적절한 속도로 충전하거나, 때로는 잠시 전원을 뽑아놓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나는 가끔씩 아프지도 않고 여행가지도 않고 특별한 일도 없는데 휴가를 쓴다. (다행히 휴가 쓰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운 조직에 있다.) 휴가를 쓰고 혼자 산책을 하거나, 부족한 잠을 몰아서 자거나, 가끔은 조용한 카페에 나와 글을 끄적이기도 한다. 오늘은 눈뜨자마자 휴가를 날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에 왔다. 유독 페이스트리류가 땡겨서 커피와 함께 크로와상을 먹을까 뺑오쇼콜라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흔하지 않게 얻은 여유로운 평일 오전의 달콤함에 딱 맞는 뺑오쇼콜라를 선택했다.




페이스트리는 발효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버터를 이용해 수백 겹의 층을 넣은 제조 방식으로 바삭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빵이다. 모든 빵이 그렇지만 페이스트리는 특히 굽고 나서 식히지 않고 포장해 버리면 바삭함은 눅눅함으로, 부드러움은 질김으로 변하는 최악의 식감으로 변해버린다. 한 김 식히는 것이 맛있는 빵을 만드는 작업 중의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쉴 새 없이 빵을 구워내야 하는 유명 베이커리라고 해도 이 과정을 절대 생략하지 않는다. 약간의 시간 단축을 위해 위해 빵의 퀄리티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가 내가 원할 때 달리고 쉬고를 결정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하루이틀에 몰아서 하고 나머지는 퇴근 후의 삶을 즐기거나, 몇 달 동안 달렸으면 얼마간은 상대적으로 과중하지 않은 업무 위주로 배분을 요청한다거나, 그도 어려우면 휴가라도 최대한 활용해 본다던지 하는. 자체적으로 한 김 식히는 장치를 해두지 않으면 내 삶도 어느새 굽고 나서 바로 포장한 페이스트리처럼 눅눅하고 질겨져 버릴 수 있다.




너무 지치고 힘든데도 휴가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알뜰히 모아 놨다가 며칠이라도 붙여서 길게 여행을 가기 위해서. 그것도 좋다. 근데 일상이 너무 지쳐있고 식힘이 필요한 상태라면, 한 번의 긴 여행보다 그때그때의 짧은 쉼을 선택하는 것도 나를 아끼는 나름의 방법이다. 요즘 당신의 매일이 조금이라도 배터리가 닳으면 바로 충전해야 하는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면, 내일 하루는 뺑오쇼콜라와 함께 카페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득 받으며, 남들이 퇴근하는 저녁 6시까지 느린 충전으로 인생의 바삭함을 유지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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