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_내가 돈이 없지 빵이 없냐

분노조절 장치가 필요한 당신에게

by 옆집여동생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일부는 자아의 실현, 권력에의 욕구, 소속감 등을 위해 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돈을 버는 것이 회사를 다니는 제1의 목적일 것이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부수적으로 성취나 인정 등이 나름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지만, 그래도 나에게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내일 바로 이 회사를 그만둘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간혹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빡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 날은 회사 인사 시스템에 접속해서 퇴사 버튼 주위를 얼쩡거리거나 퇴직금을 미리 정산해보곤 한다. 물론 실제로 퇴사 버튼을 누르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하고 퇴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른 회사에서 나를 노예직원으로 받아주는 것이 결정된 경우 당당히 퇴사 버튼을 누르기도 했지만, 몇 번 이직을 해보니 이 회사나 저 회사나 그지 같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고 어느 회사를 가던지 빡치는 일은 디폴트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이직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게 되었고, 인간계를 벗어나는 수준의 빡침이 아닌 이상 참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회사를 때려치고 싶은 날엔 무엇이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꼭 비싼 음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어떤 날은 떡볶이에 튀김을, 어떤 날엔 한우를, 또 어떤 날엔 빵을 마음껏 먹는다. 특히 빵이 먹고 싶은 날에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하기도 한다. 바로 방금 만든 빵을 먹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빵순이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아무리 맛있는 빵집의 빵이라고 해도 금방 만든 빵을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사회생활에 시달려서 에너지가 없을 때는 집에서 밀가루부터 반죽해서 빵을 만들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엔 워낙에 다양한 빵들의 냉동 생지를 시중에서 많이 팔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온라인으로 배송해서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기만 해도 훌륭한 수준의 갓 구운 빵을 먹을 수 있다. 평소에 주로 스콘이나 크루아상, 바게트 생지를 구입해 두는데, 위급 상황에 빵 굽는 냄새로 나의 분노 게이지를 아주 요긴하게 낮출 수 있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가끔은 소프트 바게트를 구워서 한 김 식히고 반을 갈라준다. 루꼴라나 로메인 등 좋아하는 야채도 넣고, 어떤 날은 사과를 얇게 슬라이스 해서 브리치즈와 함께, 어떤 날은 캐내디언 베이컨이나 잠봉을 듬뿍 넣고 버터와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먹다 보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화가 어느 정도 풀리기도 하고, ‘그래.. 이렇게 먹고 싶은 거 먹으려면 사회생활의 더럽고 치사함 정도는 어느 정도 참는 게 맞지!’라는 당위성도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닐 수 있겠으나, 나에겐 그냥 식빵에 딸기잼이 아닌 루꼴라나 브리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는 나름의 호사이고, 이런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돈이 충분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기도 하지만, 그 위에 갓 구운 빵 냄새가 더해진다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나름의 페이소스 가득한 스토리가 완성된다. 빵이나 자주 먹으려는 수작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경험해 보면 실제로 꽤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빵 러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사회생활은 녹록치 않다. 그래도 그냥 대책 없이 꾹 참는 것보다, 빵 굽는 냄새처럼 나만의 분노 조절 장치를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은 어떨까. 대부분의 회사는 그지같고 우리는 그곳에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내가 돈이 없지 빵이 없냐를 외쳐보는 정도의 귀여운 허세로 오늘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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