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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영 Oct 21. 2022

계속되는 여행에 실패란 없다

상하이 만두로 이어진 인연

 ‘무망지복(毋望之福)’, ‘무망지화(毋望之禍)’, ‘무망지인(毋望之人)’


 초나라의 유명한 재상 춘신군에겐 식객 이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원에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몹시 아름다워 춘신군은 그를 총애하였다. 이원의 누이 동생이 춘신군의 아이를 가지자 그는 춘신군에게 은밀하게 제안하였다. 당시 초나라 고열왕에겐 대를 이를 아들이 없었다.

 “대감의 존귀한 지위를 이용하여 첩을 초왕에게 바쳐 아들을 낳는다면 초나라의 모든 것이 대감의 소유가 됩니다. 제 말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춘신군은 그의 말대로 하였다. 이원의 누이는 초왕에게 총애를 받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가 황후가 되자, 초왕은 이원을 귀하게 여겨 국정에 관여하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고열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춘신군의 식객 중 주영이라는 자가 춘신군을 찾아왔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복이 있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재앙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대감은 왜 예상치 못한 재앙을 미리 방지할 사람을 곁에 두시지 않는 것입니까? ”

 “예상치 못한 복은 무엇인가?”

 “대감은 초나라에 20년간 재상으로 계시면서 실제로는 초왕과 다름 없습니다. 초왕이 병들어 머지 않아 죽고 어린 왕이 군주가 되면, 대감께서 어린 군주를 대신해 국정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다 왕이 장성하면 정권을 돌려 주던지, 아니면 직접 왕의 자리에 올라 초나라를 차지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예상치 못한 복입니다.”

 “예상치 못한 재앙은 무엇인가?”

 “초왕이 죽으면 이원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권력을 잡고 병사들을 보내 대감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상치 못한 재앙입니다.”

 “예상치 못한 재앙을 막아줄 자는 누구인가?”

 “초왕이 죽으면 이원이 먼저 입궁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때 제가 대감을 위해 이원을 잡아 죽이겠습니다. 제가 바로 대감의 화를 미연에 방지할 사람입니다.”


 ‘무망지복’은 바로 주영이 말한 ‘바라지 않은 복이 뜻밖에 찾아옴’, ‘무망지화’는 ‘뜻밖에 당하는 재화’,  ‘무망지인’은 ‘위급할 때 청하지 않았는데도 구하러 와 준 사람’을 뜻한다. 살다보면 이런 예상치 못한 복이나 재앙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리고 뜻밖에 도움을 준 ‘무망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그 옛날 춘신군이 지배하던 땅, 상하이에 갔을 때 나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구수한 만두 찌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큰 솥 하나 만두가 쪄질 때마다 가게 밖으로 연기가 폴폴 나며 달큰한 냄새가 골목을 휘감았다. 상하이 예원 앞에는 유명한 만두집이 있다. 맛있기로 소문난 이 만두집은 식당도 있었지만 1층엔 포장해서 사갈 수 있는 테이크 아웃 장소도 따로 있었다. 점심 때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이미 줄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도 줄꼬리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저기 걸어 다니느라 배에선 이미 꼬르륵 소리가 난동을 부린 지 오래였다. 아주 천천히 줄이 줄어들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만두가 손에 들어오자마자 어디 갈 새도 없이 포장을 뜯어 바로 한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한 입 꽉 깨문 순간 미간은 찌푸려지고 입은 멈추었다. 맛이 이상했다. 채 익지 않은 밀가루 냄새와 설익은 고기 비린내가 함께 입안에서 맴돌았다. 내가 만두맛을 잘 몰라서 이런가 의아해하며 한 개를 억지로 먹은 채 다른 한 개를 더 입에 넣었다. 역시 이상했다. 세 번째 만두를 입에 넣고 씹으니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사람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설익은 걸 급하게 판 모양이었다. 남은 만두를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데다 그동안 다녔던 여행지에서 먹을 것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미식의 나라 아닌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리란 기대를 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니 기다린 시간도 허무했지만 채워지지 않은 허기 때문에 더욱 쓸쓸해졌다. 아, 이런 무망지화 같은 만두여!


 음식에 크게 쓴 맛을 보니 함부로 무언갈 시도하기 무서워졌다. 현지 음식이 도무지 엄두가 안났다. 하염없이 거리를 걸어도 내가 갈 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걷다보니 옛 거리와는 정반대인 화려한 번화가가 나왔다. 젊은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여행 다니며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에 가자. 이름을 아는 식당에 가면 그나마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있겠지.’ 

 눈앞에 파파이스가 보였다. 

 햄버거 세트 하나를 시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젊은 사람들은 다 이 거리에 오는 건지 매장에 사람이 많았다. 바글바글한 식당에 테이블이 꽉 찼지만 내가 앉은 4인용 테이블만 주인 없이 조용했다. 여행 책자를 보며 햄버거를 먹고 있으려니 누군가 나를 톡톡 쳤다. 3명의 일행 이 여기 앉아도 되겠냐는 제스처를 취하며 묻고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었다. 

 나는 책을 읽다 문득 몇 시쯤 되었는지 궁금해져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그들은 내가 외국인인 걸 알게 되자 나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사실 며칠 전 동생이 황산을 간다고 상하이행 비행기표를 사러 갈 때 같이 갔다가 충동적으로 따라사서 오게 되었다고, 동생은 황산 여행 중이고, 난 상하이에 며칠 있다 동생이 오면 만날 거라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나에게 말을 건 여자는 웬디고 그 옆에 앉은 사람은 남자친구 쑨위였다. 웬디와 쑨위는 먼 지방 출신인데, 일하러 상하이에 왔다 만났다고 했다. 웬디는 커다란 눈이 아름답고 선해 보였고 쑨위는 투박하지만 듬직한 인상이었다. 줄곧 영어로 대화를 하던 웬디는 갑자기 쑨위와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몇 마디 주고 받은 후, 웬디가 아주 정중하게 말을 했다. 

 “우리, 너와 친구하고 싶어. 우리랑 친구할래요?”

 낯선 곳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이 친구하자니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난 신나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요! 좋아요! 친구하자!”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웬디가 나의 여행 일정을 물어봤다. 

 “내일은 뭐 할거야?”

 “내일…… 항저우나 갈까 생각 중이야.”

 ‘항저우나 갈까 생각 중’이라는 문장에서 가장 진지한 단어는 ‘생각 중’이었다. 정말로 아무 준비와 계획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항저우에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지만, 내가 누군가. 수년 간 다져온 경험으로 즉흥 여행 쯤은 아무렇지 않은 나였다. 당일치기로 가볍게 다녀와야지 했던 터여서 사실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은 걸 눈치 챈 웬디와 쑨위는 또 자기들끼리 대화를 했다. 웬디가 입을 열었다. 

 “내일 쑨위가 회사에 휴가내고 너랑 같이 항저우에 갈거야. 나는 일 때문에 못 가.”

 세상에! 오늘 만난 외국 친구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내일 휴가를 내다니. 나는 너무 놀랐지만 쑨위와 웬디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 받고,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얼떨떨하면서도 설렜다. 설익은 만두 하나가 만들어 준 인연이라니!

 다음날, 우리는 오만 사람들로 가득찬 상하이 기차역 앞에서 만났다. 기차표를 먼저 사야하지 않나 묻는 내게 쑨위가 말했다. 

 “기차표 사놨어.”

 “정말?”

 쑨위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항저우행 기차표까지 구매한 뒤였다. 웬디가 잘 해주라고 신신당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이어질 친절의 시작에 불과했다. 

 항저우는 대도시 상하이에 비하면 정적이었다. 겉으론 깔끔했지만 속속들이 시골같은 구석이 없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내리자 전통시장이 보였다. 재래시장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는 시장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시장엔 먹거리 천지였다. 예원 만두집에서 한 번 실패한 나는 뭐든 시도하기가 조심스러웠지만 나에겐 든든한 현지인 친구가 있었다. 온갖 꼬치들이 쌓여 있는 포장마차에서 전갈처럼 생긴 튀김 꼬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쑨위도 몇 가지 먹거리를 골라 집었다. 기차도 얻어 탔겠다, 점심 정도는 내가 사려고 했는데 쑨위는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내겠다고 말을 하자 쑨위가 말했다. 

 “넌 손님이잖아. 하나도 안 내도 돼. 기념품만 네 돈으로 사.”

 쑨위의 태도가 완강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시장 곳곳에 테이블이 있었다. 우린 구매한 먹거리를 들고 자리 잡았다. 쑨위가 잎에 쌓여 있는 무언가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게 뭐야?” 

 “이거, 거지닭.”

 “거지닭?”

 “응. 옛날에 어떤 거지가 우연히 만들게 된 음식이라 이름이 거지닭이야. 한 번 먹어봐.”

 거지닭은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 중 하나다. 옛날에 조리도구가 없던 가난한 거지들이 연잎에 닭을 싸서 통째로 진흙에 구웠는데, 그 맛이 기가막히게 맛있어 유명해진 음식이라 한다. 이름과는 다르게 거지닭은 부드럽게 입에서 살살 녹았다. 

 “우와, 맛있다!”

 전갈 꼬치도 짭쪼름한 게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시장에서의 점심은 눈도 입도 즐거웠다. 

 항저우는 모든 것이 컸다. 점심을 먹고 가장 먼저 간 곳은 서호였다. 서호는 무려 6km에 달하는 인공호수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항저우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극찬을 한 바 있는데, 항저우 아름다움의 반 정도는 이 서호가 담당하고 있다. 자연의 호수같은 모습을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깔끔한 공원같은 느낌이 더 났다. 혹여나 그 시절 마르코폴로의 기분을 낼 수 있을까 싶어 서호 위에서 유유자적하는 놀잇배를 탔다. 뱃사공이 노를 저어 물 한가운데로 나아가니 그제야 커다란 호수 위를 비추는 햇살이 눈에 보였다. 찰랑찰랑 물소리. 따스한 햇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인상 좋은 뱃사공 아저씨는 넉넉한 웃음을 짓고, 쑨위와 나는 말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어제만해도 배고픔에 굶주린 채 상하이 구시가지를 다리 빠지게 걸어다녔는데,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도시의 호수 위에서 풍광을 구경하고 있다니. 인생 참, 재밌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상하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도 쑨위는 날 배려해주었다. 

 “뭐 먹어보고 싶은 거 있어?”

 “동파육, 서호초어”

 난 여행 책자에서 본 메뉴들을 읊었다. 우리는 기차역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기사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현지인들이 먹는 항저우식 메뉴가 많은 모양이었다. 식당 주인은 물 대신 차를 내어주었다. 자스민 차를 한 입 마신 뒤, 쑨위는 내가 말한 메뉴를 포함해 여러 음식들을 시켜주었다. 상다리 휘청이게 많은 요리가 나왔다. 동파육은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소스와 어우러져 깊은 맛이 났고, 서호초어는 조금 기름졌다. 

 쑨위는 정말로 기념품을 제외한 모든 교통비, 입장료, 음식 등 모든 비용을 다 지불했다. 무망지복. 정말로 예기치 못한 복을 하루종일 받은 느낌이었다. 귀빈 대접을 받고 있으려니, 한국 가기 전에 꼭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동생이 황산에서 오거든. 시간되면 웬디랑 같이 저녁 먹자. 저녁은 꼭 내가 살게.”

 “알았어.”

 “내가 여기 식당을 모르니까 괜찮은 데 아무데나 잡아줘. 돈은 진짜 내가 낼 거니까 넌 내면 안돼!”

 “알았어. 알았어.”

 나는 하루의 시간을 통째로 내어준 것도 모자라 모든 비용까지 낸 쑨위에게 고마워 밥을 사기로 했다. 하루 가이드를 한 보답이니 내일은 절대로 비용을 내면 안된다고 몇 번을 다짐시키고 나서 우린 다시 상하이 기차에 올랐다. 기차엔 사람이 많고 복작거렸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황산 등산을 하고 온 동생은 내가 그 사이 현지인 친구를 사귀고, 같이 항저우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쑨위가 알려준 식당으로 동생을 데리고 향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 식당 가운데 자리 잡은 웬디와 쑨위가 반가운 얼굴로 날 맞이했다. 테이블엔 알 수 없는 국물 요리가 있었다. 메뉴판은 온통 중국어여서 주문도 그들이 알아서 했다. 야채를 비롯해 거위 내장, 닭선지, 양고기, 오뎅 완자 등 여러 재료가 나오자, 웬디와 쑨위는 국물에 재료들을 넣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였다. 난생 처음 보는 요리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한 입 먹자 감칠맛이 확 도는 게 입맛에 맞았다. 알고 있는 중국어가 몇 마디 안되지만, 이 순간 해야 할 말은 알고 있었다.

 “하오츠!(맛있어!)”

 내가 사는 저녁식사였지만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길거리 노점에서 딸기 탕후루(과일에 설탕, 물엿을 발라 얼려 만든 중국 전통 과자)를 사서 한 입씩 입에 물며 거리를 걸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동생과 쑨위는 공통 관심사를 찾은 게 반가웠는지 걷는 내내 축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강가에 도착하니 와이탄에 불이 들어와 밤거리가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고즈넉한 옛 거리의 정취는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분위기에 취하게 만들었다. 강 건너 푸동 지구의 동방명주와 마천루들도 도시적인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창 걷던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서서 푸동 지구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내 친구들을 바라보자니 그들이 이번 내 여행의 무망지인임을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망했어. 설익은 만두를 먹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화를 당하면 예기치 못한 복도 사람도 얻는 법. 여행이 계속되는 한 실패 만으로 끝나는 여행은 없다. 강바람이 불었지만 춥지 않았다. 만두로 시작된 우리의 우정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참, 춘신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주영의 경고를 듣지 않고 무시했다. 그리고 초왕이 죽자 주영의 말대로 이원이 궁궐을 장악하고 춘신군을 죽였다. 전국시대 사군자 중 한 명으로 칭송받던 춘신군은 무망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복을 걷어 차버렸다. 춘신군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러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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