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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07. 2016

#19 유난히 유쾌했던 You, 호주 멜버른

감각적인 도시만큼이나 풍부했던 사람들의 표정은 영락없는 '행복'이다


멜버른 여행의 백미는 '사람 여행'

페더레이션 스퀘어

인천에서 홍콩을 경유, 마침내 멜버른에 도착하기까지 열네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땅을 밟는 듯한 기분으로 멜버른 공항 출구를 나선 시각이 오전 일곱 시, 좁은 비행기 좌석에 구겨졌던 몸을 편 것만으로 기지개가 되었던지 아니면 이제 막 밝아오는 아침 덕분인지 이내 긴 비행의 피로를 잊고 새 여행의 상쾌함을 느낍니다. 신이 내린 땅 호주, 멜버른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도착하던 날은 이상 고온으로 기온이 40도까지 올랐습니다. 더위를 피할 그늘 찾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지만 관광 책자에서나 보던 파랗고 선명한 풍광 덕분에 도시의 첫인상은 매우 근사했습니다. 페더레이션 스퀘어(Federation square)에 모인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모습들과 근사한 모양새의 플린더스(Flinders) 역사는 지인들에게 들었던, 떠나기 전 떠올렸던 호주의 분위기와 꼭 맞는 것 같아 신이 났고 시내 중심가를 도는 트램이 모두 무료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빠짐없이 골목마다 발자국을 찍어 보겠다 홀로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거리의 풍경, 깔끔한 거리에 소란스러운 군중들이 그리는 장면들이 무척 맘에 들었습니다. 


도시는 참으로 감각적이었고 끊임없이 제 오감을 자극했습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바쁜 여행이었습니다. 사계절을 하루에 즐길 수 있다는 화려한 수식어만큼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40도에 육박한 한여름 더위부터 아침, 저녁의 선선함까지 다양한 계절을 여행할 수 있었고, 먹거리와 커피, 디저트 등 풍부한 먹거리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매일 옷차림이 달라지고 기분이 새로웠습니다. 마치 매일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리고 하나 더,


야라(Yara) 강 위의 카페 테라스

또 하나 멜버른만이 줄 수 있었던 것을 꼽는다면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과 미소, 웃음소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호주 멜버른의 날씨와 자연, 풍부한 먹거리는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을 쉬지 않고 간질이는 것 같습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웃고 있는 것과 이윽고 저도 그들처럼 피식하고 이유 모를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 말이죠.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2016

많은 사람들이 호주의 자연과 먹거리를 이야기하지만, 제 멜버른 여행은 이 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몫 든든히 챙긴 '행복'과 '여유'를 구경하며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사진 속 그들의 표정을 보며 종종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저 '이 곳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멜버니안들을 보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행복이 실은 잊고 있을 때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을 꿰차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멋진 날씨 아래 끊이지 않는 미소 그리고 웃음소리

예술 거리 호시어 레인 (Hosier Lane)

멜버른에 도착한 첫날, 낮 최고기온은 40도에 이르렀지만 눈에 보이가 경치가 한여름 더위를 잊게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온 여행자에게 마치 호주의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려는 듯 힘껏 내리쬐는 햇살과 그림 같은 하늘이 벽화로 가득한 예술거리에서도 고개를 끝까지 젖혀 하늘을 바라보게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풍부한 햇살을 맞이하러 공원과 강, 거리와 광장으로 모였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눈부신 오후의 리듬에 맞춰 저마다의 방식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도시가 익숙해지기 전의 풍경들에는 배경이 필요했고 그 위에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이 그리는 장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도서관 앞이나 광장의 낮은 벽, 쇼핑몰의 계단 등 엉덩이 붙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면 어디든 앉아 여유를 만끽하는 그들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는 거대한 건물의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도시에 칠해진 색이 유독 선명해 보였던 것은 비단 화창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잔디가 있으면 등을 대고 누웠고 음악이 나오면 춤을 췄습니다. 배가 고프면 빵을 꺼내 먹었습니다. 저도 어색하나마 그들을 따라 눕고, 추고, 먹고 마셨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제가 사는 도시에선 쉽게 할 수 없던 것들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며 문득 제 주변에 앉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봅니다. 시선도 사진도 그렇게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됐습니다.



그 표정들은 그들만의 고유명사

사람에게 몇 가지 표정이 있을까요? 


웃음, 슬픔, 화남, 부끄러움, 당황, 삐침, 유혹 또는 아리송? 감정마다 하나씩만 붙여도 수천 가지가 넘을 테고 그것을 또 옅은 미소, 짙은 미소와 그럭저럭 미소 등으로 나눠 보면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표정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 혹은 기분을 세어 보면 그리 많지 않은 단어들로 좁혀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척 풍부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표현하는 방법은 턱없이 부족한 셈이죠.


하지만 제가 마주친 멜버니안들의 표정들 중 다수는 제가 아는 단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그저 '눈길을 사로잡는' 혹은 '한번 따라 짓게 되는' 그 표정들은 자유로운 거리 풍경에 마침표 혹은 느낌표와 물음표 등이 되어 바라보는 제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멜버니안들의 장기라 하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꼽겠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제가 아는 몇몇 전형적인 단어들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명사 같았으니까요. 과장을 더해 표정마다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듯 다채로웠습니다. 따분해 보이지만 기대감 가득한, 놀란 듯 놀라게 하는, 열중한 듯 여유로운 모순된 표정 그리고 감정들이 가득했습니다.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면 '그래 저런 게 있지, 있어.' 라며 맞장구를 치게 되는 표정들, 그 감정들을 건너 건너 여행하느라 어느새 도시는 뒷전이 되고, 걸음은 사람 여행이 되더군요.


이들을 이토록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풍부한 먹거리에서 나오는 다양한 감탄사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천혜의 자연을 보며 누구보다 다양한 종류의 감동을 받은 덕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이들의 표현력은 여행 내내 저를 부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가는 저녁에 종종 골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새로운 표정을 짓는 연습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얻지 못했던 재미있는 수확입니다.



기적 같은 풍경 위의 표정들에서 읽는 '꿈'

그레이트 오션 로드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왜 이렇게 많아?"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 이것만은 꼭 해보고 죽어야 한다니, 그 틈에 슬쩍 명동 쇼핑을, 강남역에서 추는 강남 스타일 춤을 넣을 수는 없는 걸까요? 하지만 호주 빅토리아주의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누군가의 '버킷 리스트'입니다. 오직 이 그레이트 오션로드만을 위해 멜버른 아니 호주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일 년에 수만 명에 이른다니 말이죠. 저도 짧게나마 누군가를 대신해 이 버킷 리스트를 급히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흐린 날씨에 사진에서 보던 눈부신 풍경은 볼 수 없었지만 그레이트 오션로드의 역사에 내 발자국도 하나 남겼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습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그레이트 오션 워크 전망대에서 마주친 노부부와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카메라를 보며 짓는 미소와 지팡이를 쥔 손에서 그들 사이의 시간과 그들의 머리칼을 은빛으로 빛나게 한 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잡지와 책자마다 약속한 듯 적혀 있던 '죽기 전에' 그리고 '버킷 리스트'라는 수식어에 콧방귀를 뀌던 그 말을 두 사람의 미소가 단숨에 믿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길에 '그레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건 사실 이들의 꿈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꾸는 것과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와 로치아드 협곡(Loch Ard Gorge), 그 유명한 12 사도상 위를 나는 헬기 속 사람들의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이 말해줬듯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243 km 길이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에 모인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사람들은 그저 '이 곳에 오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지만 굳이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니 말입니다. 이 곳에서만큼은 모든 이들이 단 하나의 표정만 짓더군요. 그리고 흐린 날씨, 아득한 풍경 때문에 오히려 더욱 환하게 빛났습니다.


 

여행 '살아보는' 맛, 퀸 빅토리아 마켓

퀸 빅토리아 마켓

멜버른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밤의 퀸 빅토리아 마켓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번, 수요일 밤에만 열리는 퀸 빅토리아 마켓의 야시장은 먹거리와 즐길 거리 넘치는 멜버른의 밤을 즐기는 멜버니안과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 흡사 '끝나지 않는 축제'를 떠오르게 합니다. 전 세계 먹거리를 한 곳에서 맛볼 수 있는 야시장의 매력은 물론이고 시장 구석구석 시끌벅적 공연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 이들이 없다면 이 야시장은 반의반 쪽의 절반도 되지 못하겠죠.


퀸 빅토리아 마켓의 야시장을 보며 환호에는 질서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지러운 대형으로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몸짓으로 춤을 추고 박자 없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불규칙한 셔터와 박수 소리가 밴드의 반주 사이사이에 파고들어 술 없이도 취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그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하고 격정적인 표정을 지을 뿐입니다. 표정에도 '날 것'이 있더군요. 


그리고 이들은 흥이라면 지지 않는 이 시장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그동안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상인들이 이 곳에 있는 것이라 생각해 왔지만 고기를 굽고 요리를 담아 건네는, 손수 고른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거나 즉석에서 뚝딱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실은 이 시장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멜버른까지 와서야 알게 됐습니다. 이들의 표정이 유독 가볍고 목소리며 손짓이 경쾌한 이유 역시 이미 제가 느낀 것들을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고기를 굽던 그는 다가가 사진을 찍는 제게 굽던 고기를 떼어 내밀었습니다.


"Enjoy it!"


그의 말은 이 시장을, 도시를 그리고 제 인생을 즐기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황금보다 더 반짝이던 그들의 여유

소버린 힐(Sovereign Hill)의 노신사

이백여 년 전, 황금을 찾아 전 세계 사람들이 호주 빅토리아주로 모였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떼부자가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욕심에 눌려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고 하죠. 빅토리아주 밸러랫(Ballarat)에 위치한 소버린 힐(Sovereign Hill)은 뜨거웠던 '황금 러시' 시대를 보낸 금광의 흔적들을 시간 여행지로 꾸몄습니다. 200년 전 거리를 재현한 레트로 스타일의 건물과 소품, 마차와 대장간 그리고 학교들에서 그 시절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역시 이 곳을 지키는 사람들 덕분입니다.


대장간에서는 쉴 새 없이 망치 소리가 들리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마차가 지나갑니다. 학교에선 시간에 맞춰 선생님이 직접 종을 치고 사진관에서는 양장을 갖춘 사람들을 그 옛날 커다란 핀 홀 카메라로 흑백 사진에 답습니다. 그리고 소버린 힐의 하루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낯선 땅을 날아오느라 그리고 시간까지 거슬러 오르느라 어리둥절한 사람들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맞이합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친구이고 한 무대 위 주연입니다.


처음엔 낯설고 마냥 놀라워하던 이들도


이내 다가가 함께 그 시대에 머물러 봅니다. 소버린 힐은 황금시대를 핑계로 이들을 만나 미소를 교환하는 멜버른만의 사람 여행지입니다. 저는 단연 이 곳에서 가장 다양한 표정들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제가 어느 도시를 여행하는지조차 잊을 만큼 몰입해서 말이죠.


소버린 힐(Sovereign Hill)



그들은 마치 저절로 행복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 역

자연과 도시는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웠고 모든 것은 풍족했습니다. 축복받은 땅에서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고 그들 역시 참지 않고 표정과 소리로 그것들을 터뜨렸습니다.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고 밤이 되면 버스가 휘청일 만큼 큰 목소리로 함께 노래를 부르던 유난히 유쾌한 그곳의 사람들, 멜버른을 여행하며 저는 무척 샘이 났습니다. 마치 저절로 행복을 얻게 된 것 같은 그들의 여유에. 하지만 이내 더 이상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 대신 이들의 표정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멜버니안들의 미소 하나하나가 하나의 도시처럼 굉장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말이죠.


사람이 여행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호주 멜버른,

어디서 다시 이런 사람 여행 그리고 행복으로의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 여행지는 꼭 그런 곳으로 정해야겠습니다.


야라(Yara) 강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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