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금요일 흐림 Dec 20. 2016

#20 잘 먹고 갑니다, 후쿠오카

먹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

훌쩍, 하지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비행기로 한 시간, 공항까지 가는 수고가 민망할 정도로 금방 닿는 거리에 제가 사랑해마지 않는 도시가 있습니다. 두어 달 씨름한 원고가 어렴풋이 그 끝을 내보이던 지난여름의 어떤 날, 이유 모를 산미 비슷한 것이 양쪽 턱을 시큼하게 꼬집던 바로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그곳을 떠올렸습니다. 훌쩍 떠나고 싶던, 하지만 너무 멀리 벗어나고 싶지 않던 제게 그보다 더 좋은 도시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쉽게도 그 날 바로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만, 오랜만에 느낀 여행에 대한 갈망이 힘이 되어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긴 글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두 손을 번쩍 들던 날, 고민 없이 후쿠오카행 티켓을 끊었습니다. 그저 홀가분하게 먹고 놀다 오자고 약속한 여행, 그래서 거리 풍경도, 멋진 신사(神社)의 오후도 없이 음식점과 음식들 사진만 가득 얻어왔습니다.


여권, 티켓 그리고 음악. 그렇게 떠났습니다.

거짓말 좀 보태 걷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더 길었던 그 여행의 기록, 그래서 제목도 '먹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먹고 놀기 참 좋았던 도시, 도시를 만끽했던 그 여행은 처음엔 그저 내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전에 없던 여행으로 즐겁게 남아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도 곱창전골을 먹나요?'

일본식 곱창전골 모츠나베(もつ鍋)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제게 그가 되물었습니다. '에- 그럼 한국인들도 곱창을 즐겨 먹나요?'

후쿠오카는 돈코츠 라멘과 우동, 멘타이코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여러 일본 음식들의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후쿠오카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을 추천해주세요.'라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망설임 없이 '모츠나베'라고 대답합니다.


후쿠오카 사람들에게 곱창은 건강식 겸 미용식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호르몬'이라는 별칭에서 곱창에 대한 이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죠. 그중 대표적인 음식은 곱창을 양배추와 두부, 부추와 함께 보글보글 끓여 먹는 전골 요리 모츠나베(もつ鍋)입니다. 한국의 곱창전골에 그 뿌리가 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맛은 제법 다릅니다. 얼큰한 한국의 전골 요리와 달리 모츠나베는 내장의 지방을 최대한 살려 부드럽고 고소한 맛으로 즐깁니다. 덕분에 먹고 나면 입 주변이 반질반질해지고 열인지 힘인지 모를 기운이 납니다.

모츠나베는 제가 후쿠오카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는 요리입니다. 보글보글 끓는 전골 요리가 고향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 고소함과 개운함에 나마비루(생맥주) 한 잔까지 곁들이면 일상과 독촉에서 몇 발짝 벗어난, '여행의 쾌감'이 엉덩이를 들썩이게 합니다. 여기에 규슈 지역 또 하나의 특산품인 말고기 회까지 곁들이니 마치 후쿠오카를 다 돌아본 듯한 기분이, 곧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깁니다. 여행의 시작으로 이만한 식사가 없습니다.


"아-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사진만 찍다 밥 다 식겠어요"

명란 하나를 통째로 올린 특제 하카타 스타일의 명란 덮밥

후쿠오카의 음식들이 일본의 다른 도시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한국 요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식 명란젓 멘타이코(明太子)입니다. 부산에 살던 한 일본인이 후쿠오카에 돌아가 부산 초량시장의 명란젓을 재현한 것이 멘타이코의 시작이라고 하죠. 그들의 입맛에 쏙 들었던 멘타이코는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는 한국의 명란젓보다 더 유명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상급 멘타이코에 와인을 곁들이는 비스트로가 후쿠오카 곳곳에 성업 중이라고 하네요.


하카타의 한 레스토랑에서 먹은 명란 덮밥은 과거 후쿠오카의 상류층이 먹던 고급 음식이라고 합니다. 단단한 명란 하나하나를 다시마로 말아 숙성시킨 뒤 특제 소스와 함께 밥에 올려 먹는데, 그 담음새가 가히 '눈으로 먼저 즐기고 카메라가 먼저 먹는다'는 표현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기에 명란을 가득 푼 국물 요리를 곁들이면 '이게 무슨 호사야'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오죠.

츠케멘과 국물 요리가 함께 나오는 명란 한바탕 세트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외모지만 맛에 있어선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데, 비교적 염도가 높은 일본 음식 중에서도 멘타이코는 그 짠맛을 즐기는 요리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짠맛을 즐길 수준에 이르게 되면 숙성된 명란의 감칠맛과 입 안에 퍼지는 향 그리고 식감이 삼박자를 이루며 입 속에 20세기 쇼와 시대 뒷골목이 펼쳐집니다. 제겐 맛보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나 지금 후쿠오카야'라는 말과 함께 보낼 사진 한 장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던 '아름다운 아침 식사'였습니다.



"가에다마(替え玉), 구다사이"

잇푸도(一風堂)의 시로마루 모토아지 라멘

후쿠오카 여행에서 새롭게 배운 말 중 첫 번째로 '바리카타(ばりかた)', 두 번째로 '가에다마(替え玉)'를 꼽습니다. 첫 번째는 라멘 면의 익힘 정도를, 두 번째는 면 사리를 추가하는 추가하는 데 필요한 말입니다. 주변에 소문난 일본 라멘 마니아인 제게 후쿠오카는 도시 전체가 커다란 푸드코트처럼 느껴졌습니다. 골목마다 맛있는 라멘집이 있었고, 묻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라멘들을 추천해 주는 바람에 많게는 하루에 두 끼를 라멘으로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녀오니 가장 후회되는 것은 '왜 더 많은 라멘을 먹고 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돈코츠 라멘의 고향답게 후쿠오카 사람들의 라멘 사랑은 유별납니다. 한국 관광객에도 유명한 라멘 체인점의 본점 앞에는 늘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큰 쇼핑 타운인 캐널시티 하카타(Canal city Hakata) 5층에는 일본 전역의 라멘집을 모아 놓은 '라멘 스타디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곳에는 회식과 술자리의 마무리에 꼭 라멘을 먹는 풍습 아닌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라멘집 내부의 활기찬 분위기까지 더하면, '라멘 성지 순례'라는 말이 창피하지 않습니다.

하카타 캐널시티의 라멘 스타디움

무더위와 원고에 치이고 지친 한여름에 가장 간절했던 것은 차가운 냉면도 팥빙수도 아닌 뜨끈하고 진한 돈코츠 라멘 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많은 라멘집을 찾았고 그 수만큼 다양한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하카타에서 텐진, 280엔부터 1200엔까지. 돌아와 이 날의 라멘 사진을 보니 빨리 다음 원고를 시작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야 이 맛을 다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드르륵 하니 아아,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니까"

하카타 스타일의 고보우텐(우엉 튀김) 우동

종종 서울의 맛집을 함께 탐방하는 친구 녀석에게 참지 못하고 신이 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말로는 이 벅찬 감동이 모두 표현이 되지 않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하카타에서 제법 떨어진 고후쿠마치의 뒷골목에서 쓰러져 가는 노포를 발견하고, 목재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근사하게 낡고 늙었다' 50년 된 노포의 풍경이 펼쳐지자 저도 모르게 '아' 하는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세시, 텅 빈 가게에서 신문을 펼쳐 읽던 주인이 귀찮은 듯 몸을 일으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소바? 우동?' 우엉 튀김을 올린 하카타 스타일의 우동을 주문한 뒤 다시 한번 노포 안을 살펴봅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 벽에 붙은 메뉴판, 기름과 물이 만든 자국들을.

맑은 국물에 두툼하고 부드러운 면, 금세 흐물흐물 풀어진 튀김의 고소한 맛. 면을 끊어 물고 국물을 한 모금 마시니 '군더더기 없이 맛있군!'이라고 읊조리던 고로 상의 평이 떠오릅니다. 400엔짜리 우동 한 그릇에 이토록 감격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곳은 가게며 음식에서 느껴지는 풍미가 대단했습니다. 친구 녀석이 가장 부러워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게 그 한정판 맞죠?"

하루 30그릇 한정이라는 해산물 덮밥

아무래도 상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는 속더라도 도전해보는 편이 낫습니다. 오픈 시간을 삼십 분 앞두고 식당 앞을 서성거린 끝에 하루 30 그릇 한정이라는 해산물 덮밥을 받고 '이런 상술이라면 기꺼이 넘어가야지'라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이후 식사 때마다 지금이 아니면 먹기 쉽지 않다는 '한정판' 메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다행히 대부분 기다리거나 서두른 수고를 보상할 만큼 맛이 있었습니다.

마음먹고 '먹으러' 온 만큼 시간이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에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나고 나니 이런 것도 건축물이나 해변을 찾아가는 것 못지않은 멋진 여행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이것은 여로모로 청춘의 여행과도 닮아 있습니다.



"한 상 가득 후쿠오카 앞에서 건배"

한 상 가득 차려진 후쿠오카 음식들

오늘따라 유난히 빨리 저문듯한 하루의 아쉬움을 달래는 데는 다양한 후쿠오카 특선 요리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이자카야가 제격입니다. 가게 앞 잔뜩 늘어선 줄에 계획에 없던 식당을 들어서고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요리를 맛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날 하루 어쩌면 여행 전체가 성공한 것 같지 않을까요. 살아 움직이는 오징어 회와 50cm가 넘는 우엉 튀김, 단돈 500엔짜리 모둠회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 밤이 그랬습니다. 가득 차려진 한 상이 프레임에 다 들어오지 않아서 몇 발짝이나 뒷걸음질을 한 후에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까요.

잔이 넘치게 담아주는 것이 이 곳의 풍습

여행인지 밤인지 혹은 대화에 취해서인지 저도 모르게 일본술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쌀되 모양의 받침 위에 술잔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그저 이 가게의 인테리어 정도로 생각했습니다만, 잔이 넘쳐 받침까지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따라주는 술에 이내 황송해졌습니다. 후에 물으니 두 잔 같은 한 잔을 따라 주는 이 지역의 주도(酒道)라고 합니다. 참 푸근한 도시입니다.


내일은 또 뭐 먹지?

하카타(博多) 항의 야경

먹기만 해도 짧은 하루를 보낸 후 저 멀리 보인 하카타 타워를 향해 걷던 걸음이 어느새 하카타 항에 닿았습니다. 간간히 야간 산책을 즐기는 운동복 차림의 시민만 지날 뿐, 항구는 고요합니다. 타워가 잘 보이는 돌계단에 걸터앉아 그동안 늘 바쁘게 걷고 뛰던 지난 여행을, 그리고 이 날을 기다렸던 여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내일은 뭐 먹지?'


숙소에 가기 전 야타이에 들러 마지막으로 라멘 한 그릇에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가야겠습니다. 조금이지만 아직 더 채울 공간, 하루가 남아 있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19 유난히 유쾌했던 You, 호주 멜버른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