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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Dec 29. 2016

2016, 여행 그리고 나

2016년도 열심히 걸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올 초 세웠던 목표, 기억하세요?


자주는 아니지만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슬쩍 올려놓습니다. 너무 고리타분한 것이라 품어 두려 했지만, 결국 새어 나오고 맙니다.


"올해 목표로 세운 것이 있나요?"


제게는 그 사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대답보다는 고개를 들어 왼쪽 혹은 오른쪽 위를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그 표정을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잠시 후 평범하거나 기발한, 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소망들을 듣고 나면 틀림없이 같은 질문이 되돌아오죠. 저는 고민 없이 몇 년째 같은 답을 합니다.


"저는, 매달 여행하는 것이 꿈이에요."


프라하, 체코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던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세운 목표.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말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돌아보니 어느새 제법 그 꿈에 가까워졌습니다. 어쩌면 내년엔 정말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https://brunch.co.kr/@mistyfriday/98


2015년을 한 달 한 달 되돌아보며 마무리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2016년 한 해 뿌린 걸음들을 추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병신년 (丙申年) 원숭이의 해,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여행 그리고 기적들이 일어났나요? 제게는 몇 번의 짧은 여행 그리고 아주 긴, 꼬박 일 년짜리 여행이 있었습니다. 2016년 마지막 주, 그 시간들을 천천히 꺼내 읽어보려 합니다.


올해도 참 많이 걸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많은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지난겨울, 프라하.

두 개의 여행, 하나의 이야기.

프라하, 체코

겨울이 한창이던 2월의 어느 날, 다시 이 도시에 닿았습니다. 다시 한번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 같은 풍경을 마주하니 두 여행이 지난 일 년의 그리움으로 연결된 긴 이야기 같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야 어떤 여행이었는지를 돌아볼 여유가 생길 만큼 푹 빠져 지낸 그 시간은 이제 수첩에 한 줄짜리 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첫 만남의 설렘보다 큰 재회의 떨림.'이라고.

도시는 여전히 아름다운 데다 그 날과 또 다른 색으로 저를 맞이하는 것이 여행 내내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떠들썩한 관광지보다는 숙소 앞 조용한 찻집, 코를 간질인 이름 모를 식당과 새벽녘 텅 빈 공원의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매일 트램을 타고 정거장 사이사이를 걸으며 특별한 목적지도, 일정도 없이 흘려보냈습니다. 덕분에 더 짙은 향으로 남은 시간, 다녀온 후에도 한동안 그것들이 가슴을 메워 체한 듯 쉬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나의 여행'이었습니다.

카렐교 위의 연인, 프라하

첫 여행의 마지막 날, 저는 팔을 힘껏 벌려 큰 반원의 작별 인사를 했지만 이번 인사는 눈웃음으로 대신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도시가 '꿈'이 아니니까요. 비행기로 꼬박 열한 시간을 날아야 도착하는 먼 땅에, 이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장이, 다리와 공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도시라는 것을 매우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찾게 될 그 날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2017년의 끝자락에도 저는 프라하의 낭만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보다 더 사랑하게 된 프라하, 사진으로만 보여드리기 아쉬워 카렐교 위의 연주를 영상으로 덧붙입니다.

이 날의 낭만이 단편적으로나마 전달되길 바라며.

프라하 카렐교 'Bridge band'의 연주



겨울과 봄 사이, 타이베이.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스펀, 대만


모든 여행이 그들의 말처럼 특별하지만은 않아,

하지만 그래서 떠나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


붉은 밤의 모스크바, 낭만의 도시 프라하 그리고 홍콩의 크리스마스 세리머니. 지난 여행들은 저를 통째로 바꿀 만큼 강렬하고 또 행복했지만 반복될수록 어째 조금씩 버거워졌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찾아야 한다며 늘 힘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반추해봅니다. 이를테면 인생이나 의미, 꿈같은 것들요. 겨울과 봄 사이 이름 없는 짧은 계절에 머문 타이베이는 특유의 소박함으로 제게 새로운 여행을 알려줬습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도시 대신 네가 주인공이 되어 보라고.

일주일간 타이베이와 인근 도시를 여행하며 수많은 장면들을 보고 또 담았지만 결국 증발되지 않고 2016년 밑바닥까지 남아있는 것은 비를 맞으며 셔터가 닫히길 기다리는 중정기념당 앞의 제 모습과 용산사에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믿음, 축제의 불꽃이 쏘아 올려지던 순간 반가움에 누른 전화번호입니다. 저는 처음으로 여행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삼사초에 하나씩 하늘로 오르는 스펀의 천등보다 더 감격적이었던 것은 날아가는 천등을 바라보며 짓는 사람들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소망이 절반쯤 이뤄진 듯, 아니 어쩌면 이뤄지지 않아도 이것으로 됐다는 듯 미소 지었습니다. 굳이 힘껏 달려가 잡지 않아도, 행복이 이미 거기 있더군요.



달력에 없던 봄, 멜버른.

내게 행복을 알려준 이들.

멜버른, 호주

비행기가 적도를 지나며 나도 모르는 새 계절은 껍데기만 남고 다른 것들로 채워집니다. 서울에는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3월,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오른 호주 멜버른에서의 하루는 그동안 제 달력에 없던 봄이었습니다. 유독 어색했던 첫 만남, 하지만 도시는 참으로 육감적이었고 끊임없이 제 감각을 자극했습니다. 날씨와 풍경, 음식 그리고 사람까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매일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에 비명을 지르면 곧이어 누군가가 따라 환호성을 지르던 곳, 제가 만난 멜버니안들은 유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노천카페를 찾는 동안 이들은 도서관 앞 잔디밭과 광장의 낮은 벽, 쇼핑몰의 계단 어디든 앉아 여유를 즐깁니다. 그 풍경들이 색을 덧칠하고 장신구를 단 것처럼 도시를 더 아름다워 보이게 했습니다. '이들을 이토록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했습니다만, 결국 돌아오기 전까지 답안지만 만지작거리다 돌아왔습니다. 마치 저절로 행복해진 것 같던 사람들, 다시 한번 만나면 조금 더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요?



봄 망울이 터지던 날, 바르셀로나.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

카르타헤나, 스페인

붉은색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스며든 햇살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안을 노을로 가득 채운 순간, 그 장면이 제겐 지난봄의 절정이었습니다. 지난봄, 제법 긴 시간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를 옮겨 다니며 누구나 알만한 것들과 꼭 보여주고픈 것들을 담다 문득 '2016년의 목표'를 떠올렸습니다. 십수 년간 한 번도 변한 적 없었지만 올해 유독 그 의미가 남달랐던 건, 낯선 도시의 어느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이 흐릿하나마 '여행자'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장과 항구, 성당부터 골목 그리고 공원, 시장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다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배경이 펼쳐졌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등장인물이 스쳐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벅찬 여행,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보니 그 위에 적힌 이야기가 마치 한 권의 책에 엮인 것처럼 부드럽게 읽혔습니다.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고 오직 행복을 갈망하는,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의 옴니버스로 말이죠. 여행 중간중간 저는 수첩에 그것들을 받아 적으며 다음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잊지 못할 그 여름, 후쿠오카.

"자, 나를 위해 준비했어"

야나가와, 일본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 지난여름은 '생애 가장 뜨거웠던 계절'로 남아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날씨, 열정 혹은 다른 어떤 의미가 됐건 말이죠.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제게 그 여름은 정말 길고 지루했습니다, 만약 그 짧은 여행이 없었다면 견디기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훌쩍, 하지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던 그때 바다 건너 한 시간이면 닿는 규슈, 후쿠오카 여행은 선물처럼 그렇게 제 앞에 '툭'하고 놓였습니다. 보낸이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요.

한동안 제겐 너무나도 치열한 것이었던 여행이 다시 즐거워진 것은 타이베이 여행 이후입니다. 그리고 그 여름 후쿠오카 여행은 오직 나를 위한 선물 같았습니다. 몇 달간 매달린 원고를 마무리한 후 원 없이 먹는 데 집중했던 그 시간들이 마치 상을 받는 것 같아 내내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죠. 프라하와 바르셀로나, 유럽 도시들을 담은 사진들에도 끄떡없던 지인들도 후쿠오카 음식 사진 몇 장에 이내 등을 곧추 세우며 묻습니다. '여기 어디야?'라고. 가끔, 아니 종종 이런 여행이 꼭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나 말이죠.



마침내 가을, 서울.

내 가장 긴 여행의 끝.

서울, 대한민국

이것은 2016년을 관통한, 아니 어쩌면 제 생애 가장 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몇 번의 짧은 여행이 이어지는 동안 마음 한켠엔 늘 아직 맺지 못한 이 긴 여행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걷는 여행자'의 시작점이었던 러시아, 모스크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시간을 떠올리며 처음부터 다시 적었습니다.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을 마음에 품었던 그 날을 떠올리는 것이 이젠 쉽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봄부터 시작한 원고에 첫 번째 마침표를 찍던 팔월의 어느 날, 끝났다는 후련함보단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공허함이 더 컸던 것을 기억합니다. 소년 시절 무심코 뱉었던 장래 희망 '생각을 파는 사람'이 이십 년쯤 지나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습니다. 2016년의 긴 여행이 마침표를 찍은 날이기도 합니다.


<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 -예담 >

앞으로 몇 번의 여행이 반복되더라도 서점에서 처음 제 책을 발견한 순간의 감격을 덮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서점 도서대에서 책장을 몇 장 넘겨보고 나서야 후련한 숨을 내쉽니다. 이렇게 2016년 여행이 마무리됐습니다.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인천, 대한민국

약속한 듯 다시 그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차가운 공기며 거리의 풍경도 그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새 가게가 들어섰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듣는 음악 역시 그땐 세상에 없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저 역시 그동안 적잖이 변했겠죠.


너나 할 것 없이 한 해를 돌아보는 겨울, 결국 남는 건 더 뜨겁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행복에 소홀했던 나에 대한 질책이지만 그것이 결국 내년 한 해 더 힘차게 걸어볼 원동력이 되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더 행복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한 번 더 제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이라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2017년,
다시 그렇게 떠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여전히 청춘이니까요.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 -예담>


믿습니다, 2017년은 분명 우리 모두 전에 없이 행복할 거라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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