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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Feb 16. 2017

#21 비가 와서,
여행하기 좋은 날이에요

비를 사랑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핑계들


결국 또 비가 오네.


호텔 창 밖으로 확인한 아침, 트램에서 내려 둘러보는 오후 그리고 식사를 마친 저녁. 낯선 도시들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느낄 만큼 저마다 다른 매력으로 저를 감동시키지만 유독 하나 겹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비 오는 풍경'을 보며 한탄하는 제 모습입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모든 여행에서 비를 만났습니다. 아니, 제가 가는 도시로 어김없이 비가 따라왔습니다. 언젠가부터 비가 내리면 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나도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려보기도 합니다.


"어쩌겠어, 이게 내 여행인걸."


종일 흩뿌리기도 하고 갑자기 왈칵 쏟아지기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창한 하늘로 보상해주는가 하면 떠나는 날까지 애만 태우다 결국 외면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에 맞춰 날아갈 듯 행복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땅 아래로 꺼질 듯 침울해지기도 합니다. 영화 속 장면을 바란 것도 아니요, 그저 화창한 하늘 아래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종일 내리는 비에 풍경은 제 색을 빼앗긴 지 오래고 우산 속 장면은 떠나기 전 세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 오는 날의 여행, 그것은 종종 누군가가 갑자기 툭 던지고 간 질문 같았습니다. 저는 흠뻑 젖은 로마와 프라하의 크고 작은 광장에서, 번져버린 지우펀과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풍경 앞에서 그 물음을 되새기며 답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답이 될만한 것을 찾고 나면 그는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그렇게 여행은 반복됐습니다.


운 좋게 비를 피해 떠나면 폭설을 마주치곤 합니다.



그러다 한 순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만났습니다.

프라하, 체코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이름 모를 상점의 쇼윈도에 기대 있던 어떤 오후, 쏟아지는 비 사이로 난데없이 내달린 여인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처럼 한 장씩 천천히 펼쳐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입이 벌어졌습니다.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하늘은 거짓말처럼 화창해졌지만, 저는 그 날 내내 근사한 단편 영화 한 편에 취한 듯 몽롱했습니다.


더 이상 빗 속의 여행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된 날이었습니다.

아니, 사랑에 빠진 날이었습니다.



그 장면들은

눈보다 가슴에 먼저 와 닿았습니다.

오늘이기에 더 아름다운 장면 그리고 남들은 갖지 못한 순간. 비가 그린 장면들은 종종 눈보다 가슴으로 먼저 맞이하게 됩니다. 그림 같은 여행지의 풍경 앞에서 동공을 활짝 열어 추억을 담았다면, 비가 그린 장면에서 저는 종종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슴 우리를 활짝 열었습니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은 도시를 품에 안듯 여행하기 시작했고, 이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이백 코루나짜리 우산을 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흠뻑 젖은 그 날, 비를 머금은 프라하의 풍경이 꼭 한 폭의 수채화 같던 아침을 종종 꺼내보며 이렇게 추억합니다. 그 날은 아름답기보단 왠지 뭉클했다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름답지 못했을 거라고. 그것은 여행의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비를 기다리게 됐습니다.



색은 짙어지고 농도는 진해집니다,

특별한 하루입니다.

비가 오는 날, 도시가 빛을 잃고 회색뿐인 이유는 그 안에 생명이 없어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비가 오면 그 색과 농도가 훨씬 더 짙어지는 장면들이 있기에. 우중산책(雨中散策)에 매료된 후 한동안 비가 오면 무작정 그런 장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치 보물찾기 하듯 말이죠. 그리고 그것들은 더러 화창한 오후보다 더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그런 날엔 버스와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걷곤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택시에선 창에 맺힌 빗방울을, 그에 비친 것들을 하나하나 감상했습니다.


비를 맞아 더 진득해진 것들에는 하나같이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웅덩이를 차는 아이의 발걸음은 말할 것도 없고 길에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더러 차가운 도시의 밤에서도 생명이 새어 나왔습니다. 소원이 가득 적힌 대나무를 지탱한 오색 끈은 비를 맞을 때마다 와글와글 소리를 내는 것 같더군요. 비가 있었기에 더 진하게 기억되는 장면들입니다.



그날의 터질 듯 그렁그렁한 감정은

아마도 내 안에 있던 것이겠죠

빗 속을 걸어가는 사내의 펄럭이는 옷깃,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두 뒷모습 사이에 흐르는 믿음 혹은 긴장감, 텅 빈 꽃집에 남아있는 꽃들을 보며 미소를 짓기도, 혹은 측은해하기도 합니다. 평범한 장면인데 비를 머금으니 사뭇 다르게 보입니다. 마치 술에 흠뻑 취한 눈빛 같달까요, 예고 없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걸 보면 말이죠.


비에 젖은 풍경에서 봄을 발견할 땐 지난봄에 사랑했던 이와 음악, 도시가 떠오릅니다. 비를 맞고 걷는 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곧 쓸쓸해지는가 하면 아무도 없는 공원의 빗소리를 장막 삼아 혼잣말로 나를 위로하곤 합니다. 지나고 보면 그 모든 장면들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그리워했고, 쓸쓸했으며 위로가 간절했습니다.


비 오는 날 초등학교 운동장 소리가 전보다 떠들썩해지고, 풀과 꽃의 색이 한결 또렷해지는 것처럼 그동안 숨겨왔던 혹은 억눌렀던 내 안의 감정들 역시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 오는 날의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우산 속에서 혼잣말을 하며 걷는 이유입니다.


이런 장면에도 역시 내 모습이 비칠까요?



비는 그렇게 스며들어,

다음 여행으로 흘렀습니다.

즐거웠고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 도저히 감출 길 없는 몇몇 아쉬움 앞에서, 비는 다음 여행을 약속했습니다. 끝끝내 미뤘던 마지막 인사는 눈물겨운 재회가 됐고, 여행 첫날의 아쉬움은 마지막 날 망설임 없이 다시 그곳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일 년만에 다시 프라하를 찾던 날, 저는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는 듯 다시 그 전망대에 올랐고, 몇 번이고 덧칠했던 제 기대보다 더 아름다운 오후를 보냈습니다. 마치 그 날의 탄식이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 비는 그렇게 흘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두 개의 여행을 번갈아 보며 인생의 모든 순간은 그 의미가 있는 것이며, 결국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배우곤 합니다. 별 것 아닌 여행일수록 그 가르침이 친절하고 담백해서 깊이 와 닿습니다.



오랫동안 내린 비가 그쳤습니다,

얼마 만에 보는 화창한 하늘인가요.

영영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도 결국은 그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열린 하늘은 근심을 다 씻은 마음처럼 깨끗합니다. 모든 것은 제 색을 찾고 비를 피해 사라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도시와 풍경을 채웁니다. 바닥에 고인 작은 웅덩이에 비친 풍경이 마치 지난 추억처럼 남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보통의 하루', 그 풍경 속에서 열려있던 가슴우리를 잠시 닫고 동공을 열어 보통의 여행을 이어갑니다. 한바탕 비가 씻어 내린 도시는 마치 새것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보물 하나씩 찾은 듯 환히 웃으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제 이마에 따가운 햇살이 닿았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어버렸습니다.


이것 역시 오늘 비가 두고 간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래도 다음 여행에서 만나 물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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