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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02. 2017

#22 축제는 끝났지만,
가을은 이제 시작이야.

구리 코스모스 공원 - 나만의 가을 축제

그래. 내게도 가을이, 있었지.

 창 밖은 화창한데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가을이란 계절은 유리창을 통해서만 보이는 존재인 걸까요? 대강 마무리하고 뛰쳐나갈까, 아예 한바탕 놀고 와서 해치우자! 싶다가도 편집팀 최대리 님의 실망한 표정이 아른거려 애꿎은 엉덩이만 한쪽씩 들었다 놓습니다. 괜히 마음만 들떠버린 오후 두 시, 아이폰을 집어 들었지만 저를 찾은 이는 없군요. 그냥 내려놓긴 뭣하고,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누릅니다.


 SNS라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많게는 하루에도 몇 장씩 사진을 올리는데 정작 지난 사진들을 보는 일은 흔치 않거든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료한 표정으로 지난 사진들을 넘겨 보다 한 지점에 이르러 눈이 살짝 커집니다. 바쁘게 화면을 쓸어 올리던 엄지 손가락이 화면을 꾹 눌러 움직임을 멈춥니다. 그곳엔 언젠가의 가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코스모스 가득한 꽃밭의 노을이.


 ‘그래, 내게도 가을이 있었는데.’


https://brunch.co.kr/@mistyfriday/79

 해마다 이 즈음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어딘가에 잠겨 있다가 썰물에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하나씩, 불규칙하게. ‘아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뭔지 알아?’라는 엄마의 목소리, 그녀가 도시락을 열었을 때 피어오른 김밥 냄새,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의 실루엣. 그리고 자연스레 그리워지죠. 꽃 그리고 꽃밭이.


 가을이면 어김없이 다녀왔는데, 지난 이삼 년 결석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때 바빴던가 기억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역시나 전처럼 간절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을이. 그땐 새벽부터 짐을 싸서 그녀의 집 앞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자전거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꽃밭을 거닐다 왔는데. SNS에 올라온 사진은 벌써 삼 년 전의 기록입니다. 그 사이에도 분명 가을은 있었을 텐데 말이죠.


 집에 가는 길, 버스 정류장 옆으로 코스모스 몇 송이가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고 오랜만에 가을꽃밭에 다녀오기로 다짐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카메라와 읽을거리를 가방에 챙겨두고 의자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요.



 열한 시쯤 구리 한강시민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삼 일간 이곳에서 가을 축제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열기가 아직 온기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펼쳐진 코스모스 밭 중간중간 세워진 ‘꽃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안내판, 넓은 잔디 광장에 어지럽게 놓인 플라스틱 벤치와 아직 철거하지 않은 홍보 부스 텐트, 구석에 쌓여있는 하얀 쓰레기 봉지들. 어제 이 곳은 무척 화려하고 뜨거웠겠죠?


 저는 축제가 끝난 직후의 여운을 좋아합니다. 축제 한복판은 제가 서 있기엔 너무 뜨겁고, 채 식지 않고 남은 이 정도의 온기가 좋습니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머리보다 살랑이는 꽃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언젠가 딱 한 번 축제 기간에 온 적이 있는데, 연인의 손이 아니었으면 이리저리 휩쓸리다 그대로 꽃밭 밖으로 떨어져 나갔을 거예요. 그 후로는 축제가 끝난 후에 조용히 머물다 가곤 합니다.



축제가 끝난다고 꽃이 사라지진 않으니까요.


 여백 없이 코스모스로만 시선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이곳의 풍경은 제가 '가을'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몇 장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남자들처럼 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제 마음을 유일하게 흔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몇 개의 구멍은 있지만 해마다 약속한 듯 같은 장소를 찾고 있습니다. 


 올해도 공원엔 색색의 코스모스 꽃이 가득합니다. 매년 보는 풍경이지만 가까운 꽃에서 먼 풍경으로, 분홍과 보랏빛 색에서 살랑이는 움직임으로 하나하나 보면 역시나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고 소년처럼 방방 뜨는 기분, 잠깐 동안 지난 몇 해 결석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감동이 앞으로 몇 년 더 봐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기를.



나는 당신을 이렇게 보고 있어요.

 몇 번의 가을 그리고 축제가 반복된 사이 저만의 코스모스 보는 방법도 생겼습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햇살을 마주 보고 햇살을 받아 선명해진 꽃잎의 실루엣을 보는 것. 처음 이 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분홍과 보라, 흰색 등 꽃들의 색을 첫 번째 ‘사랑에 빠진 이유’로 꼽았지만, 이제는 햇살을 받아 선명해진 꽃잎의 실루엣이 흔한 꽃의 색보다 이 꽃에 대해 더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쪼그려 앉고 뷰파인더 속으로 강하게 들어오는 눈부신 가을볕에 아찔해지기 일쑤지만 돌아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은 대부분 이런 장면들입니다.




이 길을 이제 혼자 걷네요.

 함께 손 잡고 걷던 사람들은 떠나고 이제 혼자 꽃길을 걷습니다. 그래도 잡은 손을 놓기 싫어 사진 찍는 것을 포기했던 그 계절의 설렘이 이 곳에 남아 있는지 외롭거나 허전하지 않습니다. 꽃밭에 다가가고 물어나며 수년만의 재회가 주는 반가움을 만끽하고, 사람들의 모습에서 가을의 향취를 즐깁니다. 함께 걷는 연인들의 뒷모습, 돗자리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웃음소리 덕분에 더 근사한 가을의 풍경입니다. 혼자 온 제게 단체 사진을 찍어 달라는 사람들의 말도 내가 이 뒤늦은 가을 축제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반갑기만 합니다. 


 축제가 별건가요, 이 날 오후 내내 공원에는 저마다의 가을 축제가 열렸습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골든 타임이에요.

 끝이 보이지 않던 꽃밭도 걷고 감탄하기를 반복하며 걸으니 곧 그 끝이 보이고, 두어 시간 지나니 크게 한 바퀴를 걸음으로 둘렀습니다. 시간은 아직 절정의 오후. 기온이 29도까지 오른 여름 같은 가을날이었습니다. 재회의 달콤함과 계절의 풍미로 이미 배가 불러 이대로 돌아가도 좋겠다 싶었지만, 노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챙겨 온 읽을거리와 먹을거리들을 펼쳐 놓으니 제법 소풍 분위기가 나더군요. 노을이 올 때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간들간들 가을바람이 뺨과 손등을 간질이고, 시시각각 온도가 다른 볕을 힐끔힐끔 보느라 두 번째 읽는 책인데도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가 됐습니다.


 오후와는 확연히 달라진 색온도. 저 멀리 하늘에 조금씩 붉고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고 눈부셨던 볕은 보기 좋을 만큼 줄었습니다. 꽃밭에 다가가기 전에 잠시 멈춰 한눈에 가득 담으니 새로운 축제장에 온 것 같습니다. 오전보다 부쩍 많이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예쁜 옷과 신발로 멋을 냈더군요.


 노을이 질 무렵, 이 시간에 보는 코스모스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 다 설명이 되지 않는 애틋함이 있습니다. 역시 기다리길 잘한 것 같습니다. 붉은 노을 아래 가을꽃의 실루엣, 가을은 이제 막 시작됐지만 아마 이 모습이 2017년 가을의 첫 번째 장에 기록될 것 같습니다. 


축제는 끝났지만, 가을은 이제 시작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꽃은 이제 막 만발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을은 사계절 중 가장 너그러운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소리치고 싶습니다. 벌써 이만큼 코스모스 꽃이 피었다고.

긴 여름을 무사히 이겨낸 우리에게 최고의 가을이 찾아왔으니 더 늦기 전에, 축제의 채비를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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