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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09. 2015

24장. 러시아 종합 전시 센터 VDNKh (ВДНХ)

구소련 역사가 보전된 곳

대형 복합 문화공간 VDNKh (ВДНХ)
폭설 위에서의 감동



우연히 만난 현지인에게서  추천받은 장소가 바로 이 러시아 종합 전시 센터 VDNKh (ВДНХ)입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주요 관광지를 어느 정도 돌아보고 난 후에는 늘 '현재 러시아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는데요, 그러던 중 얻게 된 이 ВДНХ에 대한 정보는 단비처럼 소중했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근대 러시아가 가장 융성했던 소비에트 연합 시절의 다양한 유산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현재는 독립 국가가 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지역을 상징하는 개성 있는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그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가 여행자가 관람하기에도 충분한 가치가 있고, 현재는 대관람차와 다양한 놀이기구도 함께 운영되고 있어서 모스크바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과천 대공원(?)- 


그래서 모스크바 외곽으로 한참을 나가야 하는 지역임에도 소중한 여행 후반 하루를 투자해 다녀왔습니다. 아마 제 러시아 여행 중 가장 먼 곳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스크바 중심부를 벗어나 도착하는 데만도 한 시간 가까이가 소요됐으니까요. 2012년, 원래는 지금보다 작은 크기의 모스크바 시 지역이 인근 지역을 흡수하면서 확장되었다고 하죠? 아마 그 이전엔 이 곳이 모스크바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먼 여행(?)이었습니다. 


http://vdnh.ru

모스크바 여행 정보에서 그 이름조차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지금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생소한 이 VDNKh(ВДНХ)는 Выставка достижений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 (인민 경제의 성과 전시)의 약자로, 영어로는 All-Russian Exhibition  Center라고 합니다. 한글로 직역하면 모든 러시아 전시 센터 정도 될까요? -영 어색하네요- All Russian이라는 이름 답게 러시아의 역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요 전시장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고 합니다.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 후 현재는 독립 국가가 된 키르기스스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관 등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센터 내부에 지어진 약 30여 개의 크고 작은 건물과 조각품 등은 각 지역과 시대를 대표하는 서로 다른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그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곳이라죠. 가까운 전철역은 ВДНХ (VDNKh) 역으로 약 도보로 약 5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ВДНХ에 있는 다양한 전시관과 건축물들 



종합 전시 센터 ВДНХ에도 수많은 전시관과 러시아를 기념할 만한 장소, 유적들이 있지만 ВДНХ역을 통해 들어서는 이 주변 지역에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러시아의 상징적인 시설과 박물관들이 다수 위치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주 강국 러시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주 기술 박물관과 유럽 지역에서 가장 큰 수목원인 Moscow Botanical Garden of Academy of Sciences가 있습니다.


http://www.kosmo-museum.ru

러시아 우주 기술 박물관 (kosmo museum)


전철역에서 전시 센터로 가는 길 왼쪽에 위치한 또 하나의 큰 단지는 러시아 우주 기술 박물관 kosmo museum입니다. 구소련 시절부터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우주 기술을 갖고 있는 러시아의 우주 탐험 역사에 대한 내용과 당시 사용했던 우주선, 위성 등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 가상 우주선 조종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날 목적지였던 ВДНХ 근처에는 앞서 말씀드린 우주 기술 박물관을 비롯해 대규모 공원 Park Ostankino이 조성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식물원 Moscow Botanical Garden of Academy of Sciences이 있습니다. 





모스크바 곳곳을 다니며 '땅이 넓은 게 이런 게 좋은 건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러시아의 수도인 대도시임에도 외곽 쪽엔 이렇게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대규모 공원과 녹지가 조성되어 있으니 말이에요. 맘 놓고 숨 쉴 땅 한 평 넉넉잖은 서울을 생각하면 더욱 대비가 됩니다.



느닷없이 내린 폭설


전에 한 번 비유한 적 있지만, 모스크바의 겨울 날씨는 예쁘지만 앙칼진 성격의 러시아 여성 같습니다. 내내 냉담한 거야 겨울이라 그렇다 쳐도, 중요한 순간에 꼭 이렇게 서릿발을 내립니다. 게다가 수십 분에 한 번씩 폭설과 햇살을 오가는 변덕까지 부리니 가끔은 야속하기도 합니다. 이 날의 날씨 역시 그랬습니다. 아파트에서 나서던 아침에는 그나마 흐린 하늘 사이로 햇살이라도 조금씩 비춰주며 '희망 고문'을 하더니 막상 목적지인 ВДНХ에 도착하니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립니다. 이 날 아침의 엄청난 눈발은 제 모스크바 여행에서 만난 가장 심한 폭설 best 3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앞으로 나가기조차 힘든 폭설에 새벽녘 어머니들 개천 산책처럼 뒤로 걸어들어가며 오늘 목적지 ВДНХ 정문에 입성합니다.


당시의 폭설 상황입니다


ВДНХ 정문


누구한테 그렇게 자랑을 하시려고 하셨는지, 구소련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입이 떡 벌어지는 대규모를 자랑합니다. 호텔 건너편에서 본 외무성 건물이며, 안을 다 돌아보기도 힘든 굼 백화점, 제 생애 가장 큰 건물이었던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건물까지. 아마 한국에 이런 건축물 하나만 있어도 관광지로 사람이 몰릴 텐데 여긴 이 정도는 이제 그저 평범한 '대문'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겨울을 맞은 ВДНХ의 정문은 조명 장식으로 더욱 '블링블링' 단장했습니다. 해가 지면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겠죠? 아무래도 모스크바 겨울 여행은 짧고 우중충한 낮시간 보다는 차라리 길고 화려한 밤을 공략해야 하나 봅니다. 입구부터 늘어선 수많은 모스크비치 속을 뚫고 저도 난생 처음 ВДНХ에 입장합니다.






겨울을 맞은 ВДНХ

흐린 날씨와 눈 속에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움



제 러시아 여행 후반부가 늘 그랬듯 이 날도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고, 폭설까지 내리는 터라 이 거대한 센터의 웅장함이나 건물과 녹지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기에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고리키 공원이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는 달리 이 곳은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요, 대다수가 저 같은 해외 관광객이 아닌 현지 시민들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곳이 현재도 모스크바인과 가까운 복합 문화 공간이기 때문이겠죠?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날씨는 정말 정말 아쉬웠지만 중앙 전시관의 화려함은 그 속에서도 빛이 납니다. 이 전시관이 이 센터의 중심 격으로, 앞 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좌/우로 각 전시관과 놀이 기구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유명한 분수가 있는데, 이 날은 겨울 시즌이라 분수 주변을 스케이트장으로 운영 중이더군요. 그래서 분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물도 안 나오고-



겨울 시즌에는 대형 분수 주변 구역이 이렇게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해 시민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분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만, 시민들에겐 이렇게 훌륭한 스케이트장을 제공하니까요. 겨울의 모스크바에는 저렇게 시내 곳곳에서 스케이트장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스케이트장마다 사람들도 정말 많고요. -스케이트 타 본 게 언제였더라?-



폭설 속 ВДНХ의 풍경들


약 두 시간가량 ВДНХ 내부를 돌며 많은 건물들의 아름다운 모습과, 녹지와의 조화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오후 내내 내린 폭설로 관람도 사진도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수 많은 기념관 건물들과 조각상 등의 기념물들이 단 하나도 같은 게 없을 정도로 저마다 개성 강한 모습이어서 추위도 잠시 잊고, 짧은 오후가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구경했던 기억입니다. 내부는 곳곳에 녹지가 잘 조성되어 있고, 크고 작은 연못도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시민들의 휴식처로서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베스트는 바로 이것


이 ВДНХ의 수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건물은 우즈베키스탄 관(Pavilion of Uzbekistan)이었습니다. 마침 폭설이 오던 날 새하얀 색상의 독특한 건물을 보니 마치 겨울 왕국의 산 위에 지은 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유일하게 내부에 들어가 보고 싶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보아 구소련 당시 우즈베키스탄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것이 그 쪽의 전통 건축 양식이라면 우즈베키스탄에도 한 번 가보고 싶어 지네요.     

고풍스러운 입구가 마치 볼쇼이 극장 입구를 연상시켰던 '투르크메니스탄 관(Pavilion of Turkmenistan)'


 러시아 역사마저 벅찬 저에게 그 외 독립 국가들에 대한 전시는 관심을 주지 못해서 전시관들의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건축 방식들로 각 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었던 야외 관람(?)도 충분히 즐겁고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을 맞아 척박해진 이 땅에,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를 잇는 홀리데이 시즌에 맞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은 축제 기간이 끝난 후 이렇게 다시 꽁꽁 얼어붙었지만, 관광객들이 이 앙증맞은(?) 눈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어가며 겨울만의 추억을 만드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마 전 개최되었던 소치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와 각종 관련 기록들이 이 전시 공간 내에도 가득합니다.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와 소치는 러시아 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죠. 아마 소치 동계 올림픽 관람과 함께 모스크바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들을 위해 종합 문화 공간 격인 ВДНХ에 동계 올림픽 관련 장식물과 공간들이 조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현대의 모스크비치를 위한 휴식/여가 공간



러시아 역사와 현재를 소개하는 다양한 전시관과 함께 모스크바 시민들을 위한 여가 공간이 이 ВДНХ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청룡열차, 디스코 팡팡, 범퍼카 등의 놀이 기구와 인형 사격 등의 기념품 게임장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죠. 크고 작은 6개의 테마 파크가 모스크바 전역에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ВДНХ의 작고 낡은 놀이기구들도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여가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겠죠.



넓은 땅을 이용해 입구 좌, 우측에 두 동으로 조성된 놀이공원은 어디까지나 이 전시 센터를 찾는 사람을 위로하는 용도일 뿐, 이 곳만을 위해 찾아오기에는 영 부족해 보입니다. 현대의 번쩍번쩍한 테마파크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이들 장난 같은 수준에, 그마저도 시설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지역에 나들이를 나온다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 소풍 장소로는 크게 나무랄 데 없겠습니다. 한국의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을 연상시키는 익숙한 놀이 기구들 사이로 높게 솟은 저 대관람차는  그중에서 가장 탐나는 놀이기구로, 어딘가 동화 속에서 본 것 같이 익숙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랫만이라 더 반가운 범퍼카도 있네요, 저거 나 드림랜드에서 어렸을 때 많이 탔었는데!


정문을 기준으로 입구 바로 우측에 위치한 이 대관람차는 850이란 이름의 모스크바 관람차로 1997년에 완공된 러시아의 대표 관람차라고 합니다. 최고 높이 80여 미터로 요즘 쟁쟁한 세계의 대형 관람차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완공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람차 중의 하나였다고 하죠. 기대와 달리 이용객은 많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도 저기 올라 모스크바 전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행 후반부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바쁜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여기 와서 뭘 한 건데?-


전시관 못지 않게 놀이 공원에 관심을 보이는 인파가 많았습니다만, 한겨울 날씨 때문에 실제 운행되는 기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모스크바 겨울 여행의 한계를 느끼며 눈으로나마 맘껏 담아봅니다. 비록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이나 연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이 곳에 모여든, 그리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ВДНХ가 구소련 시대에 대한 러시아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memorial place를 넘어 현대 모스크바인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추억과 향수를 따라 걸었던

그래서 더 의미 있었던 여행



사실 이 곳은 제 친구나 지인이 모스크바를 여행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아닙니다. 구소련 시대의 향수를 품은 이 곳의 전시관들은 외국 관광객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있고, 무엇보다 모스크바 시내와 상당한 거리 때문에 대부분 길지 않은 모스크바 여행에서 주요 관광지를 포기하고 이만큼의 시간을 가치가 있는가 되묻게 하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친절했던 그 친구 덕분에 모스크바에 다녀왔음에도 영영 몰랐을 지도 모를 ВДН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고, 짧은 시간과 안 좋은 기상 여건에서나마 직접 방문하고 눈으로 확인했던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그저 뉴스에서나 들었던 '쏘련', 단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 시대의 다양한 유산들은 특별한 건축물들과 그 안의 전시들로 현재 러시아의 정신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고, 그 공간에 현대 러시아에 필요한 문화, 여가 공간을 접목해 따분하지 않은, 러시아인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시대의 건물과 소치 올림픽 마스코트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을 보며, 그리고 이제 자유롭게 웃으며 이 곳을 즐기는 러시아인들의 표정을 보면서 이 곳만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옅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행 후반의 새로운 목표였던 '모스크바인처럼 여행하기, 러시아인들이 사랑하는 곳에 가기'는 결론적으로 '오늘, 강추위, 하지만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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