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하벨 시장의 오후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비가 오면 뭔가가 일어난다
수백 년짜리 전통시장. 하지만 이제 이 곳에서 그 시간이 낸 곰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낡은 건물과 군데군데 떨어진 가판뿐이다. 공장에서 대강 모양이나 낸 기념품은 이제 그들의 것이 아니며 이곳에만 있는 것도 더 이상은 없다. 그래서 이 시장을 걷는 것은 잡지 속 사진을 보는 것보다 따분했다. 흥정하는 사람들의 실랑이만이 가끔 흥미로운 풍경이었을 뿐, 형형색색 물건들 때문에 눈만 따가웠다. 처음 온 곳이 이렇게 따분할 수가 있나 싶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 시장이 변할 것 같진 않으니 내가 변해야 했다. 쓸모없는 것을 사는 것보단 떠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때쯤 비를 만났다. 봄비치 고는 제법 거센 소나기다.
한두 방울의 예고도 없이 수천 방울이 한시에 쏟아지며 땅을 두드린다. 급하게 머리 가릴 곳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표정을 꺼낸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가만히 바라보는 이 곳이 어제까지 나를 통째로 떨리게 한 그 생소함이라고. 비는 삽시간에 이 시장을 다시 새것으로 만들었다.
규칙적인 빗소리에 익숙해진 바보 같은 귀가 빗소리를 지우고, 기어이 아무 소리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을 때쯤, 그녀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지됐던 풍경에 몇 걸음을 내차니 곧 다시 새것이다. 그녀가 달려온 건너편으로 달려 아무 일도 없던 내 세상에도 무언가를 일으켜본다. 걸음을 뗀다. 걷고 또 뛴다. 눈을 돌리다 감고 또 뜬다. 단 하나도 같은 풍경이 없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입을 크게 벌려본다. 오늘과 다른 표정을 지어본다.
오늘 나는 몇 개의 표정을 지었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는다.
다시 하벨 시장을 걷는다. 선반에 놓아둘 것들, 벽에 걸 그림, 그 녀석이 좋아할 장식품에 언젠가 그녀에게 프라하를 소개할 때 보여주면 좋겠다 싶은 것까지. 다시 보니 그럭저럭 재미있는 것들이 뜨인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보다 그녀의 몇 걸음에 내 세상은 더 크게 변했다.
여행은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