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우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너는 놀이터 모래밭에서처럼 이름을 쓰고 나뭇가지며 돌 같은 것들을 꽂고 후비다 그대로 떠났지. 아마도 네가 필요했던 시간은 그 정도였을 거야. 언젠가 한 번은 그게 견딜 수 없이 싫었어.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흘러갔을 내가 네 손 끝이 스치는 대로 갈라지고 파였으니까.
이제 와서 어쩌면 그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해. 그 사이 내가 조금 더 어른이 된 걸까. 아픈 건 여전한데 말야.
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엽서며 사진에서 본 프라하는 언제나 화창했으니까.
떠나는 날 아침 마주한 비는 그래서 더 낯설게 다가왔다. 여행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해 놓을 거란 착각을 했나 봐, 이 도시에게 나는 무작정 찾아온 낯선 사람일 뿐인데.
머리칼을 타고 떨어진 빗물이 시야를 가릴 때쯤 처마 아래 잠시 머문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계속 걸었고 종종 멈췄다. 비가 오니 불편한 것이 새삼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돌아와서야 내가 종일 우산 살 생각 한 번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든 우산을 하나하나 보았으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떠올려보면 나는 여행지에서 한 번도 우산을 산 적이 없다. 비가 오면 닦아가며 나섰고, 눈이 오면 털어가며 걸었다. 이방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떠나기 전에도 나는 종종 그렇게 걷고 싶었다, 단지 그 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뿐. 용기라면 이것도 꽤나 무모한 것이었다.
이 도시는 어제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 있던 곳과 완전히 같은 곳이면서 전혀 다른 곳이다. 스니커즈를 벗어 비를 쏟아내다 왼쪽 어깨 너머 풍경을 보고 나는 이 날 처음으로 웃었다. '너를 만난 게 행운이구나'라고.
유난히 큰 빗방울 하나가 내 눈인지 렌즈인지를 때려 시선을 번지게 한다. 풍경이 번지고 흔들린다. 왠지 이 쪽이 이 도시와 더 어울려 그대로 두고 본다. 나는 어느 엽서나 사진에서도 이런 프라하를 본 적이 없었다.
며칠간 수없이 걸었던 길에서, 잊을까 봐 수백 장을 담았던 풍경에서 새로운 여행을 마주한다. 이내 달려 내려와 익숙했지만 낯설어진 골목으로 파고 든다. 어제 보았던 것들과 그제 만났던 이들, 처음 이 곳에서 마주한 장면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새 이만큼 달라진 나를 보여주고도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나는 뭔가 내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비를 맞아 도시의 모든 색들이 한결 진해진다. 고막이 예민해지는지 거리의 소음이 가슴까지 파고들어 내내 두근거리게 한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간지럼에 아주 약해서 이내 신음 같은 것들을 내뱉고야 만다.
그 날 이 도시 곳곳에 흩뿌려진 정서들도 봄비를 맞아 한결 짙어졌다. 이방인은 우산 대신 고개를 내밀어 비를 맞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흘겨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그 날 내가 가진 가장 큰 특권이었다.
사람들은 한 없이 혼자이고 더 없이 함께이다.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을 볼 때면 동행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들은 웃거나 무표정이었지만 내겐 웃고 있거나 웃음을 참는 것으로 보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불청객 같았던 봄비와 꽤나 깊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풍경은 더 크게 복작대고 혹은 텅 빈다. 알 수 없는 말들 사이의 빗소리는 웅성웅성 울리고 소외받은 좁은 골목길 레스토랑 주변은 빗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채운다. 두 소리 모두 뜻을 알 수 없으니 다행이었다. 뜻 모를 글자와 알 수 없는 말들 속에서 여행은 한결 자유로워진다.
어떤 것들은 더 또렷해지거나 아주 흐릿해버린다. 보지 않던 것에 시선이 머물고 흔해 빠져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에 새삼 간절해진다. 어떤 한 장면에선 도무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시선을 가득 채운 무엇 때문에.
그것은 마치 당신과 마지막으로 나눈 짧은 볼 키스 같았다. 차라리 없었던 것이 나았겠지만, 덕분에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익숙했던 시간보다 잠깐의 낯설음으로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 다시 말하지만 당신을 만났던 것은 더 없는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