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사진전展을 보다
퓰리처 사진전展을 보다 '
사진은 뭘까?
이미지의 기록인가, 아니면 선동의 수단인가?
예술의 전당에서 퓰리처사진전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수상작을 전시했는데
1940년대의 흑백사진은
작품성도 있고 낭만이 있어 볼만 했는데
컬러시대로 오면서
사진이 작품성보다는 인간의 잔혹함, 추악함을 주로 드러내는데
적합한 수단처럼 보였다.
그 점은 인간의 물질문명이 발전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겠으나
컬러로 보는 현실은 차마 인정하기 싫은,
혹은 외면하고 싶은 그런 장면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소말리아, 짐바브웨, 우간다- 혹은 중남미 -콜롬비아, 베네주엘라,
아시아-이라크, 베트남, 이란, 태국등의 정국이 불안정한 나라들이
사진의 주무대였다.
왜냐면 그 곳에서 항상 사고와 사건이 존재하는 나라니까.
학살, 처형, 잔혹, 인간에 대한 멸시, 이런 게 퓰리처사진전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사진이 선동수단으로는 아주 유효하지만
인간의 선함을 자극하는 데는 부족한 매체이다.
지난번 로버트 카파전에서는 세상의 아름다움, 깊이, 성찰 등등
긍정적인 면을 많이 느꼈는데
이번 전시회는 많이 불편하다.
이런 賞이 필요한가?
그리고 이런 전시회를 인간이 볼 필요가 있는가?
근원적인 회의가 들었다.
이렇게 인간이 잔인할 수가 있으니
거기에 맞서 싸우라는 건지
아니면 자기성찰을 통해 인류평화에 이바지하라는 건지
회의가 든다.
아무튼 아직까지도 역겹다.
태국에서 좌익대학생을 나무에 목매달아 처형하고
죽은 시체를 매질하고
그보다 더한 장면은
그 장면을 보고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이다.
집사람은 내가 역겨워하자
집에선 CSI나 혹은 전쟁 영화는 잘 보면서
왜 그러냐고 묻는다.
내가 영화는 픽션이라 허구지만
사진은 현실이라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다고 설명해도
수긍 못한다.
이럴 땐 감정의 괴리가 크다.
그런 사진을 보고 그냥 루오의 그림을 보듯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2000년대 사진은 자세히 안보고 대충 훑어 봤는데도
볼 작품은 다 봤다.
특히 소말리아에서 미 특수부대원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흑인의 눈에서 본 광기.
그 눈을 보면서 나도 전쟁터에서는 저럴 수 있을 것인가?
되물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답이 들렸다.
돌아 버리면 저렇게 미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됐다.
무엇이 인간을 저토록 광기 어리게 만들었단 말인가?
무엇이 罪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살인인지도 모르고
인간을 저토록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행했던 정치가 저 정도였던가?
아님 인간이 본래 저토록 잔인한가?
퓰리처賞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태국에서 혼란의 와중에 거리에 쓰러져가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본인 종군기자를 보면서 그 가치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걸 세계에 고발하고 그 걸 賞 주는 제도는 문명의 야만이 아닌가.
참, 많은 종군기자와 사진기자가 죽으면서까지
그런 참혹함을 세상에 고발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 받을 만하지만 그들이 상 받으려고 그렇게 목숨 걸고
촬영을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냥 작품을 통해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고는 인정하되
상이라는 제도로 그들의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방학이라 초등생들이 단체로 관람 와서 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하는 가이드는
그동안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얼핏 들은 적 있는
포로로 잡힌 베트콩을 길거리에서 리벌버로 베트남 군인이 처형하는 사진에 대해
그 베트콩이 베트남 육군대령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 여섯을 죽였다고
설명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 아차 싶더라.
그럼 죄를 지은 인간은 무조건 같은 인간인 개인이 죽여도 된단 말인가?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본인이 반론을 제기할 기회를 줘야지
사람 목숨하나를 길거리에 지나가는 강아지처럼 대한단 말인가?
죄지은 인간은 벌 주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초등생들이 혹시나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 몹시 우려스러웠다.
그러므로 오늘의 전시회는 슬프고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