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작전참모격인 입부 이순신은 종실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미수 허목의 기록을 보면, 종실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문과를 준비하다가 무과급제하고 선전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강진현감이 되어 행정경험도 쌓았고 이후 온성 판관이 되는데 그를 알아본 학봉 김성일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선조21년(1588년) 의주 판관이 되었고 곧 혜산첨사가 되었다.
이후 왜인을 대비하여 인재 추천을 하여 변방을 방비케 하였는데, 이때 방답첨사로 서용된다.
이때 충무공을 만나 성지를 수리하고 방비태세를 갖추게 된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충무공은 그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왕실 종친에다 유학을 공부한 입장이라 충무공과 잘 맞은것 같다.
난중일기에,
임진년 5월 1일 “방답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를 불러들였다. 모두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버렸으니, 義士라고 할 만하다.”
계사년(1593년) 6월 15일 “우수사, 충청수사, 순천부사, 낙안군수, 방답첨사가 와서 함께 햇과일을 먹다가, 날이 저물어 헤어졌다.”
정유년(1597) 12월1일 “경상수사 이입부(李純信)가 진에 왔기에 그와 대책을 논의했다.”
1차 출격 당시에는 순천부사 권준의 궐위로 중위장을 맞아 출전한다.
이후 싸울 때마다 앞장서서 공을 세우니 충무공이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
““이순신(李純信)이 힘을 다해 싸워 자기가 거느린 군사만으로 적을 네 번이나 이겼는데, 머리 벤 것을 공으로 여기지 않았고, 당항의 싸움에 장수를 베고 진을 함락시켜 공로가 가장 높았으니, 여러 장수 중에 이 사람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사람입니다. 이번 행상(行賞)에 이순신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싸운 공로만 있고 싸운 상은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절충장군으로 진급시켜 호서 수군절도사(湖西水軍節度使)를 제수하였다. *주1>
그 뒤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좌천되어 1년간 있다가 유도방위대장(留都防衛大將)·전주부윤·전라병사 등을 지냈다. 오위장(五衛將), 행 훈련도정(行訓鍊都正), 동지중추부사, 호남 수군절도사, 수원 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 경기(京畿)ㆍ호남(湖南)의 방어사(防禦使), 서해(西海)ㆍ호서(湖西)ㆍ호남(湖南)ㆍ영남(嶺南)ㆍ함경남도(咸鏡南道)의 절도사(節度使)를 지내고 군(君)에 봉작(封爵)되었다. 직계가 올라서는 지훈련원사, 훈련대장이 되었으며 도총관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임해군(臨海君 이름은 이진(李珒). 광해군의 형)의 옥사(獄事)를 일으켜 연루된 무신들이 많았는데, 공도 구금되었다가 조사받고 풀려나와 관직과 봉작(封爵)이 복구되었다. 3년 후에 호남 절도사로 9월에 군영에서 졸하니, 나이 58세였다.
<난중잡록 3(亂中雜錄一)>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山西 趙慶男著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좌상(左相)은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言)을 임시로 통제사에 임명하고, 전라 방어사 원신(元愼)을 임시로 병사에 임명하였다. 이시언이 하동으로 달려가니, 진인이 먼저 이순신(李純信)으로서 통제사를 임시로 정하여 이미 수군을 영솔하고 있으므로 이시언이 즉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진인이 여러 군사를 이끌고 남해진(南海陣)으로 들어가 탐색하여 군량 만여 석을 거두었고 우마도 셀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대로 유산(流山)에 머물렀다. 수병들이 전후로 수급을 벤 것이 천에 달했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잘못 죽은 자도 많았다. 병옹(病翁)도 또한 남쪽 사람이다.” *주2>
<李忠武公全書 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1592년 9월 11일
防踏僉使李純信。盡瘁邊備。變後愈勤。四度討賊。必先奮擊。至於唐項浦接戰時。射斬倭將。其功超等。只力射殺。不務斬頭緣由。各別褒啓。而褒賞之文。獨不參純信之名。軍情駭恠。諸將中權俊,李純信,魚泳潭,裵興立,鄭運等。別有所恃。期與共死。而每事同論畫計。權俊以下諸將。皆陞堂上。唯此純信。未蒙天恩。故伏竢朝廷宣褒之命。
(방답첨사 이순신은 변방 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썼으며, 네 번이나 왜적을 무찌를 적에도 반드시 앞장서서 공격하였습니다. 특하 당항포에서 싸울 때에는 왜적을 활로 쏘아 죽이는 데만 전력하고, 목을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별도로 이렇게 장계하는 것입니다. 이번 포상의 글월 가운데 홀로 李純信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놀라고 있습니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도 권준, 李純信, 어영담, 배흥립, 정운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으나, 오직 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엎드려서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시기를 기다립니다.) *주3>
그는 충무공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해 수군재건에 큰 공을 세웠다. 아마 그동안의 그가 쌓아온 신뢰 때문일 것이다. 충무공 이후에 병사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장수일 것이다.
이런 공로로 선조때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인조때는 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숙종5년(1679년)에는 무의(武毅)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주1>완천군 묘갈(미수 허목 저)
주2>주3> : 한국고전 번역연구원의 번역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