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참모들 10

-10. 광양현감 어영담

by 우인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


충무공의 정보참모.

어영담장군은 나이도 충무공보다 위이고 무과급제도 충무공 보다 한참 선배이나 충무공을 진심으로 복종하고 충무공도 신뢰하는 부하 장수이다.

명종 19년(1564년) 무과에 28명중 11등으로 급제하였다.


광양현감 어영담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신망은 난중일기 곳곳에 나온다.

“임진년(1592년) 1월 22일 “광양현감이 보러 왔었다.”

계사년(1593년) 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충청수사 정공, 이홍명, 광양현감이 와서 종일 군사이야기를 했다.

갑오년 4월9일 “ 어조방장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한 마음을 어찌 말하랴.”


어영담장군은 남해안 물길水路에 대해 탁월한 지식이 있어 충무공에게 주로 공격루트를 조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정에서도 알았던 일인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 26년(1593년) 12월 19일 기사에 조정에서 어전회의 중에

"성룡이 아뢰기를,

“적이 돌격해 오지 못하는 것은 순신의 힘이니, 이와 서로 호응하여 공을 이루도록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영담(魚泳潭)은 수로(水路)에 익숙한 사람이니 일을 위임시켜야 합니다.”

라고 직언할 정도로 중앙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아마 충무공의 장계덕분일 것이다.


후대에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에 보면 충무공이 현지 백성과 남해 바다에서 오래 근무한 어영담장군에게 많은 정보를 취해 승리함을 알 수 있다.


<충무공(忠武公)은 어떻게 왜적을 물리쳤나> 청성잡기 제5권 청성 성대중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호남 좌수사(湖南左水使)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

송 좌상(宋左相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魚泳潭)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鳴梁)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이다.


어영담장군은 1532(중종 27)∼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으며 진해(鎭海) 여러 진(鎭)의 막하(幕下)가 되어 해로의 험애(險隘: 험준하고 좁음)를 자세히 조사하여 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광양현감으로서 이순신(李舜臣)의 수로를 인도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棋)와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옥포 앞바다에서 왜선 30여척을 불사르고 적진포(赤珍浦)에서 왜선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 의하여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어선포해전(於善浦海戰)에서 큰 공을 세워서 그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당상관이 되었을 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策錄)되지 않아 백성들이 애석해하였다.


전쟁중에 어영담은 광양현감에서 해임될 위기에 처하자 충무공은 그를 위해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請光陽縣監魚泳潭仍任狀> 李忠武公全書卷之三 狀啓二 1593년 4월 8일

光陽縣。壤接嶺南。變生之後。人心恟懼。皆懷奔潰之計。魚泳潭鎭定安集。竟使一境之民。安堵如舊。且累任兩南邊將。水路形勢。無不慣知。計慮過人。臣中部將差定。與之謀議。累次討賊。冒死先登。仍致大捷。湖南一方。尙賴保完者。無非此人一分之力。而今因督運御史狀啓。當遆本職云。倉穀增减。似乎非臣所能知。而大槩魚泳潭。去二月初六日臣下海時率領。巨濟,熊川等地結陣。故督運御史入其縣。各穀反庫時擧案等。本縣留衛將專掌書呈。雖有加减其數。實非泳潭所犯。如使少有其失。當此艱憂之時。失一奮義之將。有妨於禦敵。况水戰非人人所能。而臨機易將。亦非兵家之良籌。民情如是。限事定姑仍其職。一以防水路之賊。一以答殘民之願。伏乞朝廷參商處置。

<광양현감 어영담이 계속 근무하기를 청하는 장계>

광양현은 영남에 붙어 있는 곳으로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흩어져 달아날 꾀만 품고 있었는데, 광양현감 어영담이 이를 진정시켜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마침내 온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옛날처럼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어영담은 여러 번 경상 지방과 전라지방의 일선 지휘관으로 임용되어 물길의 형세를 잘 알아서 모르는 것이 없으며, 계교와 생각함이 보통을 넘는 사람이므로, 신이 중부장으로 정하여 함께 일을 의논하며, 여러번 왜적을 무찌를 적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호남 한 쪽이 이제까지 온전히 있게 된 것은 이 사람의 일부분의 힘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와서 독운어사가 장게한 것 때문에 본직(本職)이 갈린다고 합니다. 창고의 곡식이 늘든 줄든 신이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대개 어영담은 지난 2월 6일에 신이 바다로 나갈 적에 데리고 나가 거제와 웅천 등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독운어사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각종 곡식을 조사할 때에 여러 안건들을 그 고을 유위장이 전담하여 제출한 것입니다. 비록 그 수량에 남거나 모자라는 것이 있더라도, 실상은 어영담이 저지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조금은 잘못이 있었다 해도 이토록 몹시 어려운 때에 의기 있는 장수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적을 막아내는 데 방해만 될 뿐 아니라, 해전하는 것은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시기에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또한 군사상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민심도 이와 같으니,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는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눌러 두어서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아뢰니, 조정에서는 참작하여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영담이 광양현감에서 어이 없게 해임되자 충무공은 그를 조방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장계를 올린다.


당항포해전이 끝나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도 어영담의 무공을 잊지 않고 보고한다.

<唐項浦破倭兵狀> 李忠武公全書 1594년 3월 10일

臣與李億祺,元均等。統率大軍。永登塲門賊陣前洋之甑島洋中。鶴翼列陣。橫截一海。前示兵威。後遏賊路矣。倭船十隻。出自鎭海船滄。緣岸行舟。助防將魚泳潭所率諸將等。一時突進。左右挾攻。六隻。鎭海境邑前浦。二隻。固城境於善浦。二隻。鎭海境柴仇叱浦。棄船登陸。並無遺撞破焚船。鹿島萬戶宋汝悰。倭船被擄人固城正兵沈巨元,鎭海官婢孔今,咸安良女南月等奪還。又被擄二名賊倭。斬頭棄去。唐項浦入泊倭船大中小並二十一隻。望見煙焰。莫不摧心。自知勢窮。下陸結陣。廵邊使李薲處。更爲催促移文。又令魚泳潭領其所率諸將。直向同處矣。適汐水已退。日且奄暮。進擊不得。唐項浦浦口。把截經夜。初五日曉頭。臣及李億祺結陣大洋。以應外變。魚泳潭領諸將。直入同浦。同日未時到魚泳潭等馳報內。賊倭盡爲逃遁。倭船二十一隻。滿載盖瓦及王竹而列泊。故並爲撞破焚滅云云。

<당항포에서 왜를 격파한 바를 보고드립니다>

신은 이억기 및 원균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영등포와 장문포의 왜적의 진친 앞 바다의 증도 바다 가운데에서 학익진을 형성하여 한 바다를 가로 끊어서, 앞에서는 군사의 위세를 보이고, 뒤에서는 왜적의 퇴로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왜적선 10척이 진해선창에서 나와 연안에 바싹 붙어서 배를 몰고 가는 것을 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좌우로 협공하자, 6척은 진해 땅 읍전포(邑前浦)에서, 2척은 고성 땅 어선포(於善浦)에서, 2척은 진해땅 시굿포(柴仇叱浦)에서 모두 배를 버린 채 뭍으로 올라갔으므로,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워 버렸습니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왜적선에 사로잡혀 있던 고성의 정병(正兵) 심거원과 진해의 관비 예금과 함안의 양가집 딸 남월등을 뺴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사로잡혔던 2명은 왜적들의 머리를 베어 버렸습니다. 당항포에 들어가 대어 있던 왜적선은 대,중,소선을 아울러 21척인데,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고는 모두들 기운이 꺽여서 스스로 세력이 궁함을 알고 욱지로 내려가서 진을 치는 것이었으므로, 순변사 이빈에게 다시금 독촉하는 공문을 보내고, 어영담에게 명령하여 그가 인솔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곧장 그 곳 당항포로 향하게 하였으나, 마침 저녁 조수가 이미 나가고 날조차 어두워서 진격하지 못하고, 위의 당항포 포구를 가로질러 막고서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5일에는 꼭두새벽에 신과 이억기는 한 바다에 진을 치고 밖에서 들어오는 사변에 대응하고,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당항포구 안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미시에 도착한 어영담 등의 급보에 “왜적들은 모두 도망해 버렸고, 왜적선 21척에는 기와와 왕대를 가득 싣고서 줄지어 대어 있었으므로, 모두 쳐부수고 불태웠습니다.” 고 알려 왔습니다.


그러나 전쟁중 전염병으로 순직하여 이순신장군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난중일기에 갑오년 4월9일 “ 어조방장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한 마음을 어찌 말하랴.”


어영담의 활약은

1. 전라도와 경상도 바닷길에 대한 완벽한 파악이 있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자기 구역이 아닌 경상도로 나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는데, 어영담이 물길을 앞장서서 안내했기에 이순신 장군은 마음 놓고 함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2. 어영담은 단순한 길잡이가 아니라, 직접 적진으로 뛰어드는 용맹한 선봉장이었다.

옥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을 맡아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공격을 이끌었고

사천 해전에서도 어영담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선을 격파했다.

당항포 해전은 도망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3. 광양에 있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영담을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할 정도로 애민정신이 있는 목민관이었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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