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참모들 11

-11. 흥양현감 배흥립

by 우인

흥양현감(興陽縣監) 배흥립(裴興立)


이순신장군의 인사참모로 볼 수 있다.


선조 5년(1572년) 무과 별시에 52명중 15등으로 급제하였다.

무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공조참판까지 승진하였으며, 시호까지 받았다.

효숙孝肅이다.


충무공이 상당히 신뢰한 인물로 보여진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보면,

1592년(선조 25) 2월 26일 “공무를 마친 뒤 흥양현감 배흥립과 순천부사 권준과 함께 이야기 하였다.”

1592년(선조25) 5월 1일 “방답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를 불러들였다. 모두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버렸으니, 義士라고 할 만하다.”

1597년(선조 27) 5월 22일 “배백기(배흥립)공도 온다고 한다. 회포를 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기록에 따르면,

배흥립(裵興立)은 1546년(명종 1)에 태어나 1608년(선조 41)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백기(伯起). 현감인 인범(仁範)의 아들이다.

1572년(선조 5) 무과별시에 52명중 12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과 결성(結城)·흥양(興陽)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명에 따라 전함을 많이 건조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의 해전에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였고, 사천(泗川)해전에서는 원균(元均)의 후부장(後部將)으로 이순신(李純信)·김득광(金得光)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이어서 한산도(閑山島)·부산포(釜山浦)·웅천(熊川)해전에 참전하였으며, 1596년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재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漆川粱)·노량(露梁) 해전에 조방장(助防將)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진하였다.

특히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崔湖)가 전사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마저 도망하자 전선을 도맡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600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듬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택정할 때 이순신(李舜臣)·원균과 함께 26인의 명단에 올랐으나, 그뒤에 확정된 18인에는 들지 못하였다.

1604년 왜란중에 세운 공로로 무인출신으로는 드물게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곧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7년 총관(摠管)으로 영흥대도호부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당시의 지휘관이던 이순신(李舜臣)의 장계(狀啓)에 권준(權浚) 이순신(李純信)·정운(鄭運)과 더불어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 일컫고 논공행상할 것을 조정에 품의한 바 있었다. 뒤에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배흥립은 충무공이 신임하는 장수중의 한 명이었다.

소위 다섯 아들중 한 명으로 거론될 정도로 신임받는 장수였다. 선박을 많이 건조하고 전쟁이 발발해서는 주로 전부장前部將을 맡을 정도로 전방에서 돌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순신장군의 휘하 장수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 받을 때에는 충무공이 장계를 올려 배속해 주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 請舟師屬邑守令專屬水戰狀> 李忠武公全書 1593년 4월 6일

謹啓爲相考事。臣所屬舟師五官五鎭浦興陽縣監裵興立。廵察使陸戰帶率。寶城郡守金得光。曾差豆恥伏兵將。還屬舟師。鹿島萬戶宋汝悰。以軍粮押領差使貟。上去未還。其餘順天,光陽,樂安,寶城等官守令及防踏,蛇渡,呂島,鉢浦等鎭將。以諸將分差。猶以爲不足。道內奉命帥臣等。以舟師諸將。或稱陸戰移差。或稱聽令。發傳令紛紜推捉。殊無水陸分定之意。且東西奔走。莫適所從。令出多門。號令不行。劇賊未除。指揮乖方。極爲悶慮。今後舟師所屬守令邊將等。勿移他處。專屬水戰事。伏願朝廷各別申飭於本道監兵使,防禦使,助防將處。


<수군에 소속된 고을의 수령들은 해전에만 전속시켜 주기를 청합니다.>

신에게 소속된 수군은 단지 5개 고을과 5개 진포(鎭浦)입니다. 흥양현감 배흥립은 순찰사가 육전(陸戰)으로 데려 갔습니다. 보성군수 김득광은 일찍이 두치(豆恥)의 복병장으로 파견되었다가, 이번에 수군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군량을 운반하는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나머지 순천, 광양, 낙안 보성 등 고을의 수령과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등 진(鎭)의 장수들을 여러 책임 장수로 배정했음에도 오히려 부족한 데, 이 지방 안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은 장수들이 위의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육전이라 핑계대며 옮겨 간다고 하고, 혹은 명령을 들었다는 핑계를 대면서 전령을 내어 소란스럽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군과 육군을 특별히 나누어 배정할 의미가 없을뿐 아니라, 이리저리 분주하기만 하여 어는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명령이 여러 군데서 나오므로 호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극성스런 왜적을 다 없애지도 않았는데, 지휘만 어그러지니 극히 민망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앞으로는 수군에 소속된 수령과 변방 지휘관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오로지 수군에만 소속시키도록 이 지방의 관찰사(權慄), 병마사(宣居怡), 방어사(李福男), 조방장(趙誼)등에게 조정에서는 각별하게 신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흥립은 효자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17살이나 어린 동생을 충실하게 돌보기도 하여 정문까지도 세워졌다.


<배 공조(裵工曹) 정문기(旌門記)>기언 별집 제9권 기(記) 眉叟 許穆著


고공경(考工卿) 배공 흥립(裵公興立)은 지극한 성품과 높은 효행이 있었다. 그 부친이 돌아가셨을 적에 어머니 김씨가 몹시 상심하여 상을 치르는 중에 병이 들었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에 이가 슬어서 빗질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공이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바른 뒤 머리를 맞대어 이가 옮겨 오게 하였다. 또한 옷을 벗고 편히 누워 자는 법이 없이 마음을 졸이며 지극한 효성을 다하기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공은 형제지간이 동생과 둘뿐인데, 공이 그 동생보다 17세나 더 많았다. 처음에 그 부모가 외아들인 공을 매우 사랑하여 일찌감치 문권(文券)을 만들어서 재산을 전부 공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그 아우가 태어나서 장성하게 되자, 어머니가 작은아들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공이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이므로 차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공이 그 문권을 가져다 어머니 무덤에 넣고 재산을 절반으로 나눈 다음 더 넉넉한 쪽을 동생에게 주었다. 그 동생이 이미 부유해지고 공도 귀하게 되었으나, 한 잔 술과 한 그릇 밥이라도 반드시 형제가 모여 같이 먹기를 평생토록 변함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군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이 일찍이 장수로 변방에 있으면서 난(亂)을 당해서도 죽음을 피하지 않았고, 한산(閑山)의 전투에서는 아홉 번 싸워 아홉 번을 이겼으나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내가 들으니,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집에서 찾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실로 옳지 않은가. 금상 7년에 명을 내려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裴參判 興立 母子孝烈呈文> 鑑湖先生文集卷之二 呂大老著


伏以褒善。國家之令典。而揚善。鄕里之美風。有善而鄕不之揚。上不得聞其善。聞善而上莫之褒。民無以勸乎善。此民等之所以追錄旣故之人。而更煩新化之日也。伏惟城主垂鑑焉。吾鄕有一令婦。卽縣監裵仁範之妻。贈貞敬夫人金氏也。仁範之歿。金氏喪祭盡誠。哀痛過節。長枕苫塊。不脫麻絰。食飮絶口。柴毁骨立。寢成疾病。未期自盡。非貞烈自守以死爲期者。豈從容盡節之能若是乎。當時鄕里以其行報于官。轉聞朝。張林之碑將著。壬辰之變適起。竟致晉乘皆灰。商閭無㫌。倘不敦奬於今日。永缺矜式於後來。甚矣時之不幸也。羣情宜乎痛惜之不能已也。金氏之子曰參判裴興立。性又純愨。事親亦勤。方金氏之在疚也。髮久不理。蟣虱散落。參判每以首承母之髮。引虱拂去之。母旣沒。以母之心爲心。撫養少弟 秀立 極其誠。少弟之生。後參判十七年。故其弟之未生也。參判以獨子。爲父所鍾愛。一家田民。分贈太優。所餘無多。弟生之後。母有憂色。參判微知母意。嘗欲分己之有以與弟。及夫人之卽遠也。參判遂懷別給之券納諸壙。盖不忍破父之手跡。而欲慰母心於九泉之下也。其弟稍長。良田美僕。盡讓于弟。飮食財産。一無爾我。亂離顚沛之際。相同死生。益加顧恤。其視末俗之爭一田一民而䦧于墻者。斯人之友愛。爲如何哉。可謂賢母之又有子也。伏願城主將此母子之貞烈孝友。轉報而聞之上。使一家雙美。共㫌幷褒。爲鄕里觀感之地。不勝幸甚。

<배참판 흥립 모자의 효열을 아뢰는 글> 여대로 저

삼가 생각하건대, 선행을 표창하는 것은 나라의 정해진 법도요,

착한 일을 드높이는 것은 고을의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선한 사람이 있어도 고을에서 이를 드러내어 알리지 않으면 윗사람이 그 선행을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포상하지 않게 되면 백성들은 선을 행할 이유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저희 백성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일을 다시 기록하여

새로 부임하신 날을 맞아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원컨대 성주께서 굽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고을에 한 정숙한 부인이 있으니, 곧 현감 배인범의 아내이자 증직 정경부인 김씨입니다. 배인범이 세상을 떠난 뒤, 김씨는 상과 제사를 극진히 정성으로 치르며 슬픔이 도를 지나 긴 베개 위에서 거친 자리만을 깔고 지내며 상복인 삼베 띠를 벗지 않았고,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아 몸은 초췌해지고 뼈만 남다시피 하여 마침내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상기를 채우기도 전에 스스로 생을 마쳤으니, 굳이 절개를 지키겠다고 작정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처럼 온전히 절의를 다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고을 사람들이 그 행실을 관에 보고하여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장림에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기록과 계획이 모두 불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을에 표창이 없게 되었으니, 만일 오늘날에라도 이를 장려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길이 본받을 본보기가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시대의 불행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슬퍼함이 그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김씨의 아들은 참판 배흥립이라 하는데, 성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부모를 섬김에도 지극하였습니다.

어머니 김씨가 병환 중에 있을 때 머리를 오래 빗지 못해 머릿속에 이와 서캐가 들끓었는데, 참판은 늘 자신의 머리를 어머니의 머리에 대어 이를 옮겨 붙인 뒤 손으로 털어내곤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어린 동생 수립을 정성껏 길렀습니다.

동생은 참판보다 열일곱 살이나 늦게 태어났기에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참판은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집안의 토지와 노비 또한

몹시 후하게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태어난 뒤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드는 것을 보고 참판은 은근히 그 뜻을 알아 자신의 몫을 나누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참판은 따로 떼어 주겠다는 문서를 품에 넣어 무덤에 함께 묻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친필 문서를 차마 훼손하지 못하면서도 저승에서나마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동생이 자라자 좋은 논밭과 훌륭한 종들을 모두 동생에게 양보하고 음식과 재산에 있어 조금도 너와 나를 가르지 않았습니다. 난리로 떠돌며 생사가 위태로운 때에도 죽고 사는 것을 함께하며 더욱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세속에서 한 마지기 땅, 한 사람의 노비를 두고 담장 안에서 다투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사람의 형제간 우애가 어떠하겠습니까. 참으로 어진 어머니에게서 또 어진 아들이 났다 할 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주께서 이 모자의 절개와 효도, 우애를 조정에 보고하여 알려 한 집안의 두 아름다움이 함께 드러나 아울러 표창과 포상을 받게 하여 고을 사람들이 보고 감동받는 본보기가 되게 하여 주신다면 이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국가에는 충성하고 집안에선 효자이고 관로도 운이 좋아 공조참판(종2품)까지 오르는 무인으로는 드물게 시호도 받은 인물이었다.


충무공이 매우 신뢰하였고 동료 장수로부터도 신망이 깊은 덕장이자 효자인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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