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참모들 12

- 12. 녹도만호 정운

by 우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녹도만호 정운은 이순신장군의 선봉장격이다. 나이도 충무공보다 위이고, 무과 급제도 6년 빨랐다. 다혈질이며 우직한 정운장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참모들이 관할지역을 월경하지 않고 관할지역만 방어하려고 하자 군관 송희립과 더불어 강력하게 출진을 독려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택당 이식이 쓴 충무공 시장諡狀에는,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먼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는 영남을 거쳐서 경사(京師)로 향하였다. 이에 공이 군대를 옮겨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부하들이 모두 진영을 옮겨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는 가운데, 오직 군관(軍官) 송희립(宋希立)과 만호(萬戶) 정운(鄭運)만이 공의 의논에 동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오늘날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왜적을 치다가 죽어야 마땅하다. 감히 안 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여러 진보(鎭堡)의 군사들을 본영(本營)의 앞바다에 집결시킨 뒤에 기약을 정해 출발하려고 하였다.

다른 참모들은 관할구역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송희립과 정운만이 출전을 주장하여 충무공이 편하게 출전하게끔 하였다.


중종 38년(1543)에 영암에서 태어난 정운장군은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창진(昌辰)으로 훈련참군 정응정(鄭應禎)의 아들이다.


선조 3년(1570) 식년시 무과에 28세로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을 거쳐 거산찰방(居山察訪)일 때 선조 16년(1583)에는 함경감사 정언신의 장계로 포상을 받는다.

그후엔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7일 기사에는

조정에서 논의 중에도 감사 정언신이정운장군을 항상 칭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응남은 아뢰기를,

정운은 이 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개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鄭彦信)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선조 24년(1591)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휘하에서 1차 출격시 후부장으로, 2차 3차 출격시 좌척후장으로 출전하여 옥포(玉浦)·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50세에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선조 25년(1592년)에 북병사로, 선조 37년(1604)에 병조참판, 정조 20년(1796)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무공도 정운장군을 매우 신임한 듯하다. 난중일기에 보면

임진년(1592년) 2월 22일 “(녹도)만호의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임진년 5월 1일 “방답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를 불러들였다. 모두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버렸으니, 義士라고 할 만하다.”


백호 윤휴의 글 <제장전諸將傳>에 따르면,

“정운(鄭運)은 영암(靈岩) 사람이다. 그는 강개하여 큰 뜻이 있어서 그럭저럭 남이 하는 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보검(寶劍)을 얻어 스스로 전서(篆書)로 ‘진충 보국(盡忠報國)’이라고 썼다.

그가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있다가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는 오직 해진 이불 한 채만을 가져왔고, 또 영북(嶺北) 지방의 찰방으로 가서는 수신(帥臣)의 하인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잡아다가 장살(杖殺)하였다. 그 후로 마침내 영락하여 불우하게 지내었다. 그러다가 녹도 만호가 되었을 때에 이순신이 마침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오자, 운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의귀(依歸)할 곳을 얻었다. 그를 위해 죽는다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그 후 왜적이 대거로 침입하여 부산ㆍ동래를 함락시키자, 영남 지방이 왜적의 기세를 바라만 보고 모두 붕괴되어버렸다. 이에 절도사가 여러 군(郡)ㆍ진(鎭)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여러 장수들을 다 모아놓고 일을 의논한 결과, 여러 장수가 모두 말하기를,

“적봉(賊鋒)이 매우 예리하여 맞아 싸울 수 없으니, 우선 여기에 군사들을 주둔시켰다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더라도 늦지 않겠습니다.”

하니, 운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다가 이윽고 궁도(弓刀)를 차고 뜰 아래로 내려가서는 본진(本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묻기를,

“어째서 그러는가?”

하니, 운이 말하기를,

“영남은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호남과 영남이 모두 우리 땅이거늘, 어찌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 야윈 것 보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울 밖과 울 안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 서로 난이점이 있는 것이니, 지금 적이 아직 호남을 범하기 전에 의당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맞아 공격하여야만 호남을 보호할 수 있고 또한 영남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머뭇거리면서 앞바다만 방어할 계책을 하려고 하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할 것이라면 여러 진의 군사들을 무엇 하러 여기에 오래도록 머물러 두겠습니까. 운이 이 때문에 본진으로 돌아갈 것을 청한 것입니다.”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녹도 만호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녹도 만호가 아니었다면 큰 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하고는, 군중에 명을 내려 당일로 배를 출발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감히 말은 하지 못하고, 몰래 욕하기를,

“왜적은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운 것은 정운의 눈이다.”

하였다.

中略

아군이 마침내 부산에 이르러 보니, 다만 운과 조방장(助防將) 정걸(丁傑)이 맨먼저 왔는데, 날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 정걸이 운에게 말하기를,

“날은 저물고 적세는 치성하니, 형세를 보아서 내일 나가 싸우는 것이 좋겠다.”하니, 운이 성내어 말하기를,

“조방장도 이런 말을 하는가. 나는 의당 저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

하였다. 이윽고 순신이 이르자, 운이 제군에 명하기를,

“적의 큰 배 한 척에서 가장 맹렬하게 탄환을 발사하고 있으니, 내가 의당 먼저 그것을 격파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나가서 힘껏 싸우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흉부가 관통되어 죽었다. 그러자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찌 정운만 혼자 죽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군사를 지휘하여 나갔으나 날은 저물고 조수가 물러가서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순신이 여러 날을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내 팔이 잘리었다.”

하고, 글을 지어 정운을 제사하였다.

中略

순신이 운과 송희립(宋希立)ㆍ정사립(鄭思立)을 심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매양 순신에게 분개하면서도 운이 두려워서 감히 화풀이를 못했었는데, 운이 죽게 되자 원균의 참소가 바로 행해졌다. 이에 순신이 매양 말하기를,“정운이 먼저 죽은 것이 어찌 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영암(靈岩)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정운을 향사하고 있다.


충무공은 정운장군이 전사하자 사당에 배향하기를 조정에 청하였다.

<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李忠武公全書 1592년 9월 11일

謹啓鹿島萬戶鄭運恪謹職事。兼有膽略。可與論難。而起變以來。激發義氣。爲國忘身。念不少弛。勤於邊事。猶倍前時。臣之所恃者。只此鄭運等二三人。三度戰捷。每每先登。釜山大戰時。輕身忘死。先突賊巢。終日交戰。力射猶亟。賊不敢動。寔運之力。而當其回帆。中鐵丸致死。凜氣精靈。空自泯滅。未聞於後世。極爲慘痛。李大源祠室。尙在其浦。招魂同榻。設奠供饗。一慰義魂。一警他人。

(녹도만호 정운은 맡은 바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또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란이 일어난 뒤로 줄곧 의기를 심하게 뿜어내어 나라를 위하여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운 등 2-3명이었습니다. 이 앞의 세 번이나 승첩했을 때에도 언제나 앞장서서 나갔으며, 이번 부산 싸움에서도 제 몸을 생각지 않고 죽음마저 잊고서 앞장서서 왜적의 소굴로 돌입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활을 쏘았던지, 왜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싸움을 마치고 돌아 나올 무렵에 그는 철환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 늠름한 기운과 순결한 정신이 헛되이 없어져서 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할까 하여 참으로 뼈아픈 일입니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흥양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게 한다면, 한편으로는 의로운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충무공이 정운장군을 위해 직접 쓴 제문은 얼마나 정운장군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정운 장군의 공적은

1. 출전 결단이다 : 임진왜란 발발 직후,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했을 때 전라좌수영 내부에서는 "우리 지역만 지키자"는 반대 여론이 높았는데 이때 정운은 강력하게 출전을 주장했다."영남과 호남이 어찌 남의 나라입니까? 적을 치는 데 네 땅 내 땅이 어디 있습니까!"이 결단력 있는 태도가 이순신 장군의 결심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결국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인 옥포해전으로 이어졌다.

2. 해전에서의 용맹함 : 정운은 옥포, 사천, 당포, 한산도 해전 등 주요 승리 현장에서 항상 최선두에 섰다.

사천해전: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이 해전에서 정운은 거북선과 함께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적의 대장선을 격침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한산도 대첩: 학익진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왜군 함대를 섬멸하는 데 결정적인 화력을 보탰다.

3. 부산포 해전에서의 장렬한 전사: 정운 장군의 마지막 활약은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이었다. 당시 부산포는 왜군의 본거지나 다름없어 매우 위험한 곳이었지만, 정운은 주저하지 않고 돌격했다.치열한 교전 중, 몰운대 근처에서 적의 대구경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죽음을 듣고 "국가가 오른팔을 잃었구나!"라며 통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도 그의 공을 1등으로 돌릴 만큼 그를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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