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쉬운 시 론論
『쉬운 시』論
최근 <쉬운 詩>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그걸 정리해 볼까 합니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는 사람이 <쉬운 시>의 함정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쉬운 시>에 관해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고요.
<쉬운 시>는 사실 잘 읽힙니다.
그리고 “나는 <쉬운 시>를 쓰겠다”는 목표는 나무랄 데 없이 좋습니다.
다만 쉬운 시에 대해 몇 가지 점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어려운 시 보다는 쉬운 시를 좋아합니다.
누가 이해하기도 어려운 시를 좋아하겠습니까.
시험 공부 하는 것도 아니고요.
1. 정말 <쉬운 시>가 쓰기 쉬운 것일까요?
가장 착각하는 부분이 <쉬운 시= 쉬운 생각> 이라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쉬운 시 = 쉬운 표현> 이지,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를 쓰기 위한 생각은 깊이 있게 하고 표현은 쉽게 한다.
이것이 <쉬운 시> 같은데, 시를 쓰기 위한 일 차 작업인 사유가 깊지 못하니 생각나는 대로 쓰고, 그런 날 것의 감정이 솔직하다고 믿게 되어 <쉬운 시=좋은 시> 이런 등식으로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써 놓은 것은 일단 시의 前 단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기나 편지글의 형태. 운문의 형태를 갖추어서 얼핏 보면 시처럼 보이지만 시는 아닌 감정의 덩어리, 푸념, 넋두리 정도.
사실 어려운 시 중에는 본인도 이해 못하고 쓴 시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어려운 시는 나쁜 것이야” 하고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려운 시에는 서양의 신화나 성경, 혹은 문화적 베이스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우리나라 시에도 중국 고전이나, 한국 고전이 배경이 된 시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적 지식이 없으면 그 시는 어려울 수 있지요.
이런 시들을 어렵다고 읽지 않고 배제한다면,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파도 싫고 시금치도 싫고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이나 라면, 떡볶이만 먹고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늘 유아기에 머물 뿐이죠.
힘들더라도 입에 안 맞는 김치, 청국장, 양파 등을 먹어 줘야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지 반면에 피자나 햄버거, 파스타 등만 먹고 큰다면 어떤 성인이 될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니 고통스럽더라도 서양 고전이나 동양 고전을 읽고 베이스를 넓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로운 일을 장식적이고 현학적인 말로 미화하는 형태로 시를 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싶어 하고 또 언어예술인 시가 요구하는 것은 사담(私談)도 사담적인 내용을 어려운 말로 미화하는 솜씨도 아닌 시적 인식이다. 시적 인식이란 그 양상이 어떻든 누구나 듣고 싶어 하고(사담은 개개인에게는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알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세계에 대한 새롭고도 구체적인 깨달음이다.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표현 행위의 결과로 현실적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그리고 현상화된 세계이다. - < 오규원 의 현대시작법>중에서
<쉬운 시>는 표현은 쉽게 하지만 그 시 안에 시적 인식이 담겨 있어야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비로소 시로 태어나게 됩니다.
2. 안목을 키워라!
제가 30년 넘게 방송일을 해왔지만 이 업계도 약간은 시 쓰는 일과 비슷합니다.
후배가 물어 온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프로그램을 잘 만들까요?”
나의 대답은 뭐 여러 가지 할 수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주었죠.
“뭐든지 촉(觸)이 생명이다.”
촉(觸), 뭐 애매한 말 같지만 우리는 감(感)이라는 말로도 많이 표현하죠.
선택을 해야 하는 직업이니 우리는 늘 여러 개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작가를 선택할 때도 누가 가장 잘 쓰는지를 알아야 성공할 확률이 높죠.
그러니 촉을 길러야 수많은 소재 중에서 좋은 하나를 택하고 여러 작가중에서 가장 잘쓰는 작가를 택하고, 가장 좋은 장면을 편집하고 이러면 좋은 결과가 나올수 있죠.
그러니 시를 쓰는 사람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안 좋은 시인지- 오규원 시인은 좋은 시, 나쁜 시로 분류하지 않고 좋은 시, 안 좋은 시로 분류하더군요 - 구별할 정도의 안목은 있어야 좋은 시를 쓸 수가 있다고 봅니다.
3. 일류와 삼류의 차이
방송쪽에서 일류작가와 삼류작가의 구분법을 보면, 사물에 대한 이해도 차이입니다.
어떻게 바라보는가? 에 대한 차이. 삼류는 일단 말이 번지르합니다.
얼핏 보면 뭐가 있어 보이죠.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삶에 대한 얕음을 두루뭉술한 말로 휘감고 있죠.
“비가 왔다/ 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돌아 왔다/ 어머니는 두부로/ 온갖 요리를 만든다.” 뭐 이런 식으로 묘사만 합니다.
일류 작가들은 그 수많은 행위 중에서 의미를 포착하더군요.
그러니 묘사는 짧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그런 의미 부여가 큽니다.
일류와 삼류의 차이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만 여러 번 읽다 보면 구별이 갑니다.
삼류는 온갖 미사여구와 묘사로 정신없게 만듭니다.
일견 멋있어 보이죠.
우리는 클리셰(cliche, 진부한 상투어)라고 부르죠.
수없이 봐왔던, 남들이 썼음직한, 그럴듯한, 이런 말들이 삼류의 전용이죠.
가장 좋지 않은 말이 ‘그럴듯한’ 입니다.
4. 왕도는 없다
방송업계에선 편집이 끝나고 시사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 의견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CP가 왕이라 고치라면 무조건 고쳤죠, 요즘은 다릅니다.
후배가 묻습니다.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죠?”
나는 답합니다. “방송의 신도 모른다.
다만 방송 후 시청자들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거다.”
각자 생각이 있습니다만, 詩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문학의 신도 모를테지요.
그러니 오규원 시인이 나쁜 시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생각에 동의해서 저도 나쁜 시라는 표현 보다는 안 좋은 시라고 표현합니다.
일류PD들은 생각이 유연합니다.
자료조사부터 FD까지 모든 스탭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그런데 삼류PD들은 회의를 수없이 해도 (스무 명이 넘는 스탭들하고 왜 회의를 하는거지?)
결국은 자신의 생각만 주장합니다.
예전에 어떤 CP가 하루 종일 십 여명의 팀원들하고 회의를 하더니 마지막엔 아주 자랑스럽게
"너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내 맘대로 결정하겠다." 라고 선언하더군요.
그 담부터는 그 CP랑 회의하면 내 의견은 얘기 안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늘 한 명의 의견일테니까요.
이 차이가 일류와 삼류를 만듭니다.
물론 내 후배 중에 내가 1시간을 시사한 후에 내 의견을 말하면 바로 수용하여 수정하는 친구들은 나한테 엄청 혼났습니다.
“너는 몇 주, 몇 달을 고민한 놈이 내가 잠깐 본 의견을 바로 받아들이다니,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바로 너다.” 이렇게 혼을 내곤 합니다.
너무 남의 이견을 따라가는 PD도 성공하지는 못하더군요.
자기 생각이 없는, 혹은 부족한 듯이 비치는
물론 자기 것이니 소중하겠죠, 얼마나 애착이 가겠습니까?
나의 자식같은 존재일 테니까요.
다만 생각이 유연해야 발전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보다 나은 의견을 계속 수용하고,
새로운 책을 읽어 새로운 경향을 수용하고 이래야
“보다 나은 예술가(T.S 엘리엇)”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 내 것만 소중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니 청맹과니와 무엇이 다를까요?
5. 결론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나 쓴 것이 모두 시가 되지는 않죠.
시적 인식을 획득해야 시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넋두리나 사담(私談)에 머무를 뿐입니다.
시적 인식이란 누구나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세계에 대한 새롭고도 구체적인 깨달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쉬운 시>는 쉬운 표현일 뿐이지, 쉽게 생각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이 오래 생각해야 쉬운 표현이 돼 <쉬운 시>가 됩니다.
시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마구 써서 운문적 형태를 갖춘다고 시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일기, 낙서, 편지글에 가까울 뿐입니다.
공감대를 획득하려면 한 단계 정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솔직하다고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일상속에서 성찰을 통해
누구나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세계에 대한 새롭고도 구체적인 깨달음이라는
시적 인식을 획득해야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