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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에서 특별한 1년

by 여행작가 히랑

나이지리아에서 특별한 1년


나이지리아의 우리 집은 대통령 숙소 맞은편에 있었다. 1000km를 차로 달려온 우리 가족은 집에 도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집은 굉장히 넓었지만 가구는 낡고 집안은 먼지투성이였다.

바로 가방 던지고 커텐 떼어내 빨고 청소를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나이지리아의 특별한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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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이렇게


“우리도 아프리카 같이 갈래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 데 두려울 게 뭐 있겠어요.”

“위험해서 안 간다더니……. 그래도 가족이 같이 가는 게 좋지. 나의 출국 수속은 다 끝냈는데 당신과 애들 거 또 해야 하잖아.”

아빠는 귀찮은 듯 말을 하지만 함께 간다는 게 좋은 모양이다.

큰 아들 2학년 2학기 때 아빠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지휘참모대학(우리나라 소령 때 가는 육군대학과 같음) 1년 과정을 가게 되었다. 처음엔 아프리카에서 사는 게 겁나고 교육 환경도 걱정이 되어 나와 두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으나 아빠 출국 한 달 남겨 놓고 함께 가기로 맘먹은 것이다.

우리 가족이 살 집은 졸업식에 한 번씩 오는 대통령을 위해 학교 내에 마련해 놓은 집과 같은 크기의 대 저택이었다. 옆집에는 식구가 11명인 현지인이 살고 있었는데 세탁기도 청소기도 없는 상태여서 가족 중 8명이 와서 우리 집 청소를 도왔다. 그 사람들 청결 관념이 우리와 달라서 청소와 빨래를 해 놓아도 너무 더러워서 도대체 깨끗해지지 않아 애먹었다.

지휘참모대는 나이지리아 Lagos에서 1000km 떨어진 Kaduna라는 큰 도시에서 차로 40분 거리 시골에 있었다. 애들 학교가 문제였는데, International School은 너무 멀어 고민 끝에 가까운 현지인 학교를 보냈다.

허름한 건물만 달랑 있는 학교에 초록색 교복을 입은 새까만 학생들이 반짝반짝한 눈을 하고 쳐다봤다. 피부가 하얀 편이 아닌 우리 아이들은 그들 사이에서 백옥처럼 하예 보였다. 동양에서 온 쌍꺼풀이 옅은 우리 아이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보다 훨씬 주목을 받았다.

두 아들을 따로 떼어 놓을 수가 없어서 2학년으로 같은 학년에 두었다. 아이들은 그런대로 학교에 가는 걸 재미있어 했다. 둘이라 다행이었다. 교과 과정과 교재가 엉성해 보이고 수학 수준도 낮지만 일단 영어로 수업을 하니 유익했다.

집이 무척 넓고 가전제품은 갖춰있지 않아 빨래와 청소를 직접 해야 하므로 일하는 여자를 한명 두었다. 이름이 ‘빅토리아’였고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한 학교 내에서 일하는 전기기사의 딸이었다. 빅토리아는 대학교에 가려고 대기 중인 여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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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들에게 하루 세끼를 정성껏 준비해 주느라 무척 바빴다. 라면도 없고 시골이라 식당, 패스트푸드점도 없으니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한국음식을 요령껏 만들어 가족에게 받쳤다.

아이들은 오후에 집에서 엄마가 개설한 한국학교에서 한국공부를 하고 빅토리아와 영어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즐거워했고 하루하루를 유익하게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엔 8시 반부터 나도 여자 대학생을 모셔와 영어공부를 했다. 그들의 아프리카 발음은 좋지 않았지만 영어회화를 차분하게 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기회였다. 아빠는 오전에 학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같이 공부하는 군인 학생들과 토론도 하고 과제도 하며 학교생활을 재밌게 했다.

개미빌딩



“애들아, 저게 뭐지? 들판에 빨갛고 조그만 언덕이 많아.”

“엄마, 공사하느라 땅을 파고 있나 봐요.”

가까이 가보니 공사 중은 아니었고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개미 빌딩이라고 했다. 개미가 흙을 물어와 쌓아 놓았는데 풀은 전혀 나지 않으며 안에 수많은 미로가 있었다. 아이들은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커다란 구멍에 들어가기도 했다. 얼마나 개미가 많으면 그렇게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지 신기했다.







나이지리아에 살면서 유일한 낙은 주말에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Kaduna 시내에 나가 식료품을 사오는 일이었다. 영국 슈퍼가 있어서 다행히 질이 꽤 좋은 공산품을 살 수 있었고 전통시장에서는 야채나 배추도 살 수 있었다. 영국문화원에서 비디오나 책도 빌려다 보았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그렇게 다 살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 날씨는 적도가 가까운 곳이라 낮의 햇빛 아래는 무척 덥고 건기와 우기가 있다. 우기 때는 하늘이 굉장히 맑다가도 하루에 한 번씩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심한 폭풍우가 쏟아졌다. 약 30분 쏟아지고 나면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아지지만 많은 전봇대가 벼락을 맞아 정전이 돼버렸다. 정전이 되고 나면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까지 적어도 하루는 기다려야 했다.

건기에는 기온은 좀 낮게 느껴지며 2-3달 동안 비가 한 번도 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겨울처럼 들판의 풀들이 하얗게 마르는 시기이다. 그렇게 나이지리아는 건기, 우기를 거치며 자연의 변화를 맞이한다.


힘들었지만 재밌게

“큰일 났다. 거실에 물건 들이 다 없어졌어.”

“어머, 어쩌지. 무서워”

어느 날 아침 새벽에 남편이 소리쳤다. 거실이 횡~했다. 도둑이 창문을 뜯고 들어와 거실 물건을 다 가져갔다. 학교에서 제공해준 TV, 영어회화와 한국노래 테이프, 구두 등 별게 아닌 물건들이지만 우리에겐 소중하고, 그들에겐 조금이나마 돈이 되는 물건들이었다. 아빠가 학교 다니며 필요한 물건은 안 가져간 것 보니 학교 내 좀 도둑인 듯 했다.

집이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학교 측에 보고하니 물건 값을 보상해주었고 우리 집 24시간 지켜주는 Guard를 집 앞에 배치해 주었다. Guard가 지켜주니 무섬증은 가라앉았지만 뜨거운 낮이나 한 밤 중에도 현관 옆에 가드가 서 있으니 맘은 편치 않았다.

‘어휴, 또.......“

“왜 그래? 싸니까 많이 먹어야지. 아프리카에선 건강해야 해.”

아빠는 심심하면 흑돼지 한 마리를 몰고 오거나 흑염소 한 마리를 사왔다. 깨끗하게 다듬어 고기만 사오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통째로 사오니 털 제거 하고 배 가르고 하는 일이 너무 귀찮았다. 털이 그대로 있는 소머리, 다리도 수시로 사와서 현지 아이들에게 면도기로 털을 깎게 해 마당에 큰 솥을 걸고 계속 끓여댔다. 정말 귀찮은 일인데 한국에서는 해 볼 수 없는 일이라고 남편은 무척 좋아했다.

한국을 알리는 ‘한국의 날’ 행사를 했다. 우리가 주관하는 행사였는데, 음식 준비를 위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사서 잡았다. 행사를 앞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비 온 뒤 정전이 되어 3일 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정전이라니……. 비상도 그런 비상이 없었다. 발전기가 있는 몇몇 집에 한국요리 할 재료, 갈비나 등심을 분산해 넣어 놓고, 현지인들 요리는 행사 며칠 전 인데도 바로 하기 시작했다. 고기에 땅콩가루와 카레를 묻힌 튀긴 요리를 200인분 준비했다. 현지인 요리는 이웃들이 해주었지만 갈비 잡채, 전 등 50인 분 정도의 한국요리는 나의 몫이었다. 다른 한국인은 없으니 혼자 해야 했다.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들었는지 행사가 끝난 후 아파서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국을 알리는 일이 그리도 힘이 들었다.

명절이나 휴일이 길 때는 200여km 떨어져 있는 선교활동을 하고 계시는 목사님 댁에 갔다. 그 댁에 전화가 없어서 그 먼 거리를 무조건 찾아갔는데, 다행히 한 번도 못 만나는 일은 없었다. 가는 길은 모두 비포장 도로여서 차가 덜컹거리고 커다란 구덩이에 수도 없이 빠졌다. 목사님 댁 자녀들과 우리 아이들이 너무 재밌게 보낼 수 있어서 위험을 감수하고 친정 가듯이 가곤 했다.

그 목사님 댁에서 가까운 곳에 사파리 투어도 할 수 있고 온천물이 흐르는 유원지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사파리를 하려고 트럭을 탔는데 옷 위로 파리가 물어댔다. 뭔지 물어보니 아프리카 수면병(계속 자다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으키게 하는 ‘체체파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숲 속의 동물이고 뭐고 바로 그 숲속을 빠져 나오려고 서둘렀다. 나오는 길에 비포장도로를 90km로 달려 나오다 핸들을 제어를 하지 못하고 언덕에 차를 처박고 말았다. 다행히 다치거나 차가 파손되지는 않았는데 얼마나 충격이 컷는 지 얼마동안 차가 계속 고장이 나서 고생을 많이 했다.

나이지리아에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말라리아였다. 그곳에는 기본적으로 모기나 작은 벌레들이 무척 많다. 반짝반짝하고 검은 피부의 피 맛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모기들은 희고 부드러운 피부의 달달한 동양인 피 맛을 좋아했다. 한두 달 지나 아들 다리를 보니 성한 부분이 없이 거의 모기 물린 자국이었다.

“우리 아들이 아파요. 열이 심하고 일어나지 못하는데……. 감기겠죠?”

“어디 봅시다. 말라리아네요.”

옆집 흑인 아주머니는 아픈 큰아들을 보고 말라리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무 놀랍고 걱정되었다. 절대 아닐 거라고 몇 번을 부정했지만 아들은 열이 40도 가까이 오르고 해열제를 먹여도 정신을 못 차렸다. 흰 눈동자가 노랗고 추워서 덜덜 떨었다. 작은 아들은 열은 없었는데 흰 눈동자가 노랬다. 할 수 없이 독하디 독한 말라리아 약을 사다 아들 둘 다에게 먹였다. 알약을 3-4일 먹고 다행히 말끔히 나았다.

“장티푸스라고 하네.

“네? 장티푸스요? 요즘도 장티푸스가 있어요?”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아 병원을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장티푸스라니...... 아닐 거야’라고 부정했지만 감기 증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목실’이라는 알약을 먹었다. 약을 먹으니 열은 내렸지만 약이 얼마나 독한 지 정신을 못 차렸고 아무 것도 못 먹고 토하기만 했다. 정신 못 차리고 누워있던 남편은 어느 날 힘없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싱싱한 회 먹고 싶다.”

“새콤한 요리 해 줄게요”

“회 먹는 상상했더니 입에 침이 고이네.”

식초 넣고 새콤하게 무친 야채와 흰죽을 함께 먹었다. 독한 약은 먹지 않았다.

그 이후 서서히 회복했고 몸무게는 7Kg이나 빠져 있었다.

아프리카 인들은 아파서 병원에 가면 무조건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라고 진단을 내리는 듯 했다. 그들은 우리가 감기 앓듯이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를 자주 앓는다. 말라리아의 백신이나 예방약은 없다. 물론 잘 낫게 하는 독하지만 좋은 약도 있고 주사를 맞으면 바로 낫는다.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서 아프지 않아도 말라리아 약을 일주일에 한 알씩 그냥 먹으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말라리아 약을 먹지 않다가 아빠와 큰 아들이 호되게 앓았다.

말라리아의 종류가 굉장히 많다. 말라리아는 걸린 지역에서 판매하고 있는 약을 먹으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잠복기가 있으므로 위험 지역을 방문하고 나올 때는 그 지역 약을 꼭 사가지고 오는 게 좋다. 말라리아 위험지역을 방문한 후에 아프면 가져온 약을 먹고 바로 치료를 해야 한다. 감기인 줄 알고 방치했다가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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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흑인만 있는 그 험하고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가족이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이지리아 생활은 쉽게 해볼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불편함에 불평하지 않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이상적인 생활이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위험한 곳에까지 가야 했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아빠에게는 더 큰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때 나이지리아에 가지 않았다면 그 이후의 삶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니 나이지리아에는 잘 다녀온 셈이다. 무엇보다 건강하게 귀국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나이지리아에서 어려움을 견뎌낸 경험은, 우리 가족이 살면서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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