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몇 살 부터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성인의 영역에 출입이 가능해지면 어른이 되는 걸까. 19살은 아이인데, 20살은 어른이고 그저 나이를 먹으면 되는 게 어른일까. 나는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져야 하는 누군가가 타인이 될 수도 있지만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재'는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일조차 버거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아 본 적 없이 내몰리기만 했던,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만 했던 생존 본능 그 자체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고 곧 성인이 될 나이가 되었어도 겪어보지 못한 것을 자연스럽게 해낼 리가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꾸 누군가가 책임져주길 바란다. "책임질 거예요? 나 책임질 수 있어요?"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 테다. 영화 속에서 '영재'에게는 생존본능 이외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영재'가 '요한'이 되고 싶은 이유는 하나다. 거기서는 머물 수 있으니까. '영재'에게 '요한'은 꿈이다. 더 이상 쫓겨나거나, 밀려날 걱정이 없이 내 가족, 내 가정, 내 집, 내 방, 내 보금자리. 어딘가에 소속된 상태로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있기 위해서 '요한'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득바득 그렇게 되려고 하지만 주변에 도움 되는 사람은 없다. 자꾸만 벼랑 끝으로 '영재'를 몰아간다. 밥상에 같이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크다는 이유로 "거인"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영재'도 아직 애다. 어른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며, 별생각 없이 학교 다녀야 하고, 그저 당장 숙제가 하기 싫고 시험 성적이 걱정인 그런 평범한 일상에 안주해야 하는 애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나 힘들고 허락되지를 않는다.
'영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재'에게 던지는 좋은 말들과 안 좋은 말들. 나는 그 모든 말들이 '영재'에게 어떻게 들렸을지가 궁금하다. 나라면 그 말들이 좋든 말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네가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등의 이 영화에서 꼽히는 명대사들도 그들은 '영재'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고, 명대사라고 곱씹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당장 쫓겨나면 돌아갈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을까 봐, 모든 것에게서 버려질까 봐, 돌아가게 될 곳이 돌아가서는 안되는 곳이어서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은 '영재'에게 그런 말은 그조차도 사치일 테다. 엄마가 있고, 가족이 있고, 소속이 있고, 따뜻한 밥이 있고, 돌아가 누울 집이 있으니 내가 내 말에 속는지 아닌지 생각해 볼 여력도 있겠지만, '영재'에게 중요한 건 스스로가 뱉는 말 따위가 아니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아 보고 싶은 그런 것일 테다. 나를 제발 한 번만 책임져줘요. 내게 또 무엇일랑 더 보태 무겁게 하지 말고 제발 나를 한 번만 살려줘요. '영재'가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칼을 들었을 때 내 마음까지도 너무나 무거웠다. 그 표정이 너무 낯익어서 마음이 아팠다. 밥 한 끼를 먹어도 맘 편히 먹어야 든든하게 먹고 생각도 바뀌지,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면 그건 그대로 명치에 걸려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영재'도, '영재' 동생도, 또 다른 '영재'였던 '범태'도 좋은 어른을 만나 안정과 안전 속에 1년 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기억으로, 그때 배운 이런저런 것들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아이에게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을 가르쳐 줄, 평범과 평온을 줄, 그런 어른이 아이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