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TCH Oct 23. 2015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

지하에서 또 만나


          이산 가족 상봉의 순간은 항상 울게 만든다. 어렸을 때는 그저 그들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울었고 나이를 적잖이 먹고 나서는 그들의 심정을 1/100이나마  통감할 수 있어 울었다. 


          수십 년 동안 누군가를 애달프게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차라리 죽었다면, 가슴에 묻고 죽은 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상대방이 생각날 때마다 기억을 더듬고 추억을 더듬으며 그 자양분으로 살아갈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다면 가슴에 묻지도 못할 것 같다. 죽었다는 가정보다 살아있다는 가정이 더 참혹해서 가슴에 묻지도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배는 곯지 않는지, 추위에 떨고 더위에 허덕이진 않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건만 그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까 하루가 걱정이고, 하루가 노심초사일테다. 그런 일상이 하루하루 켜켜이 쌓여 갈 테다. 그래도 숨 쉬고 살아가는 인생인지라 내 인생을 살다가도 바람 한줄기에 떠오르고, 글 한 줄에도 떠오르고, 햇빛 한 줌에도 떠오르는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애달픈 상대일 테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올라오는 사진들은 사연 한 톨도 쓰여 있지 않아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보고 싶어 했고, 만지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들려 주고 싶어 했는지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사진 속 그들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진은 그렇게나 만남부터가 눈물이다.


          그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서로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와 만난 자신들이  또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그들은 뼛 속 깊이,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꼈을 것이다. 두려웠을 테다.  온몸의 기가 거꾸로 돌아가고, 누군가 나의 어깨를 붙들고 한없이 위로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내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뱀이라도 되는 것 같이 꿈틀거리는, 무언가  뱃속 깊이 응어리져서 휘몰아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모든 걸  대신할  수밖에 없는 그 기분 그 느낌.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다는 그 명확한 사실이 주는 그 모든 것들을 감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감히  궁금해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영역이다. 


          그저 그들이 후에 정말로 지하에서라도 또 만나 질 수 있기를, 그래서 그때는 헤어지지 말고 복작거리며 여느 사람들처럼 지지고 볶으며 다사다난하게 원래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애박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