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 또 만나
이산 가족 상봉의 순간은 항상 울게 만든다. 어렸을 때는 그저 그들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울었고 나이를 적잖이 먹고 나서는 그들의 심정을 1/100이나마 통감할 수 있어 울었다.
수십 년 동안 누군가를 애달프게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차라리 죽었다면, 가슴에 묻고 죽은 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상대방이 생각날 때마다 기억을 더듬고 추억을 더듬으며 그 자양분으로 살아갈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다면 가슴에 묻지도 못할 것 같다. 죽었다는 가정보다 살아있다는 가정이 더 참혹해서 가슴에 묻지도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배는 곯지 않는지, 추위에 떨고 더위에 허덕이진 않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건만 그게 그렇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까 하루가 걱정이고, 하루가 노심초사일테다. 그런 일상이 하루하루 켜켜이 쌓여 갈 테다. 그래도 숨 쉬고 살아가는 인생인지라 내 인생을 살다가도 바람 한줄기에 떠오르고, 글 한 줄에도 떠오르고, 햇빛 한 줌에도 떠오르는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애달픈 상대일 테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올라오는 사진들은 사연 한 톨도 쓰여 있지 않아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보고 싶어 했고, 만지고 싶어 했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들려 주고 싶어 했는지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사진 속 그들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진은 그렇게나 만남부터가 눈물이다.
그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서로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와 만난 자신들이 또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그들은 뼛 속 깊이,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꼈을 것이다. 두려웠을 테다. 온몸의 기가 거꾸로 돌아가고, 누군가 나의 어깨를 붙들고 한없이 위로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내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뱀이라도 되는 것 같이 꿈틀거리는, 무언가 뱃속 깊이 응어리져서 휘몰아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모든 걸 대신할 수밖에 없는 그 기분 그 느낌.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다는 그 명확한 사실이 주는 그 모든 것들을 감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감히 궁금해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영역이다.
그저 그들이 후에 정말로 지하에서라도 또 만나 질 수 있기를, 그래서 그때는 헤어지지 말고 복작거리며 여느 사람들처럼 지지고 볶으며 다사다난하게 원래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