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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Nov 09. 2015

수능 D-1

그리고 수능 당일, 그리고 수능 다음의 날들


잠도 안 오고 수능이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됐으니 수능썰이나 풀어볼까. 그때 나 스스로 긴장하고 떨린 것 보다는 주변 친구들이나 사람들의 긴장과 떨림으로 긴장하고 떨렸던 것 같다. 그 알 수 없는 부담감과 알 수 없이 삼켜야 했던 마른 침들.


D-53부터 출석번호에 해당하는 종이가 떼 지고 A4용지 남짓한 크기의 디데이 종이에 빼곡히 외우고 싶은 것들을 적어 그 종이를 먹거나, 태워 재를 물에 타 마시기도 하며 다들 그렇게 자신만의 굿을 해댔다. 나는 1번이었기에 D-1 종이를 떼야했다. D-1 종이를 떼러 나갈 때의 나를 향하던 그 두려운 눈빛들을 잊을 수가 없다. 떼 지마, 떼 지마. 떼 지마. 하지만 결국은 떼여진 나의 디데이 종이에는 친구들의 응원 메시지가 가득 적혔고, 나는 그걸 꾹꾹 접어 부적인 것처럼 조끼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D-1은 예비소집일이다. 예비 소집 장소에서 만난 다른 학교 친구들과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몰래 내가 시험치는 교실을 엿보러 갔었다. 원래는 그러면 안되는 거라 황급히 뛰어 건물을 빠져 나왔더랬다. 나오던 순간 첫 눈이 내렸다. 싸라기눈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찾아왔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친구였다. 순수하게 나를 응원하러 왔을 뿐인데 나는 그 친구가 있는 내내 불편했다. 그 친구가 가져온 엿이나 그때 당시 유행하던 볼펜 안에 말려 들어가게 쓰는 종이 편지에 빼곡히 적힌 응원의 글들이 불편했다. 그 친구가 없다고 해서 그 시간에 써머리 노트를 볼 것도 아니었는데 불편했다. 그 친구는 정작 얼마 안 있고 돌아갔는데도 말이다.


쉬이 잠들지 않을 것 같더니 우습게도 금방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수능 당일 새벽.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처음으로 수능 때문에 겁이 났던 것 같다. 수능을 보는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였다. 가방을 싸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교복에 농구패딩잠바를 입고 어슬렁어슬렁 새벽 골목 밖으로 흘러 나왔다. 전 날의 싸라기눈은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일찍 왔던지 교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TV에서 흔히 보던 수능 당일, 시험 치는 학교 정문 앞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전 날 봐 두었던 교실에 들어가 교탁 앞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노트를 꺼내 놓고 읽으며 교실 안 난로의 따뜻함을 느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느꼈던 따뜻함은 요 맘때 항상 생각난다.


그렇게 시간은 8시를 넘어 가는데 한 아이가 자신이 시험 치러 와야 할 학교가 이 학교가 아님을 깨닫고  뛰쳐나가고 경찰 오토바이가 오고 한바탕 난리가 나며 나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내가 이 학교에 오는 게 맞나 이 자리가 맞나 빠트리고 온 치명적인 무언가는 없나 허둥지둥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교시 언어영역이 시작되며  진정되었고, 감기 기운이 있어 멍-했지만 꽤나 잘 풀렸다. 언어영역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푸는 방법으로 여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보기를 읽고 질문을 읽고 지문을 읽는 게 최고였다. 그렇게 문제를 풀고 보니 두 번이나 확인을 하고 답안지 작성까지 끝냈는데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래서 시험지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로봇끼리 싸우는 그런 낙서였다.


그런데 감독관으로 들어 와 있던 교실 앞 뒤의 남녀. 그러니까 서로 다른 학교에서 온 선생들이 눈이 맞았는지 어쨌는지 자꾸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속삭인다고 속삭였겠지만 그 상황에 속삭임은 얼마나 큰 소리인가. 20년이 거진 되어 가는 이때에도 그 작자가 중국어 선생이었다는 건 잊을 수 없다. "난 000 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쳐요"라고 했을 때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용히 좀 해주세요"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잠시 조용해졌던 그들은 다시 피식 거리며 몇 마디 나누었고 그땐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다른 아이가 조용히 해달라  얘기했다. 아마 요즘에 그랬으면 인터넷에 올라오고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선생은 시험지와 답안지를 걷어 가며 "공부 못하는 애들이 꼭 그런다"라는 얘길 했다. 아, 내가 당신보다 좋은 학교 나왔을 것 같은데- 미안. 아무튼 그 선생의 말에 나보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애들이 화를 내면서 선생은 얼굴이 벌게져 쫓기듯 교실을 나가야 했다.


그 후론 시간이 너무도 잘 흘렀다. 보온 도시락 속 따뜻한 밥도 잘 먹었고 모든 시험이 잘 끝났다.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하얗게 태웠다. 수험표를 가지고 오면 여기저기서 할인해준다 하여 친구들은 놀다 가자 하였지만, 너무 지쳐버려 집에 가고 싶었다.


감기 기운 탓인지 빨리 집에 가서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눕고 싶었다. 번쩍번쩍 거리는 음악과 소음이 가득한 길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오늘 하루에 대해 굉장히 우울함을 느끼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서도 부모님께 뭐라 말하지도 않고 그냥 옷을 갈아 입고 방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잠도 오지 않았다. EBS를 무심코 틀었다. 답안을 맞춰 주기에 앞서 간략히 이번 수능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아, 그렇게나 좋아하던 채널인데 훅 하고 짜증이 올라왔다. 수험표 뒤에 빽빽하게 적어온 답을 맞혀 봤다. 그리고 고기 반찬에 밥을 먹고 만화책을 보다 뛰쳐나와 마당을 마구 뛰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다시 우울해져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날의 심리 상태를 뭐라 표현할 수 있으랴.


수능 다음 날이 됐다. 뭣 하나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 느낌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게 다였다. 뭔가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곧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신명 나게 매일매일 미친 듯 놀았던 것 같다. 아마 해법수학과 개념원리 수학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를 깡그리 포대자루에 쓸어 넣고 창고에 넣어버렸었지 싶다.


수능 보는 친구들. 수능을 보고 나서 느끼는 허탈감, 만족감, 기대감, 공포감 그 모든 것들은 그때는 어마 무시하게 크고 치명적인데, 살다 보니 그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데면서 느끼게 되더라. 그러니 부디 수능 때 느끼는 그 감정들을 즐겁게 즐겨주시길. 공부 같은 건 진짜 상위 0.1%로 잘하는 거 아니면 다 필요 없어. 그 아래는 다 똑같다. 그리고 그게 어떤 전환점이나 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완성이나 망가짐의 치명적인 작용은 하지 않으니 모쪼록 즐겨주시길. 그 후의 일은 또 다른 일로 도모하면 그만이더라. 어쨌든 이왕 보는 수능이니 지금까지 노력에는 반드시  보상받기를 바라고 바란다. 뭐 요즘은 수시로 먼저 많이 가버려서 상대적으로 이미 놀자판인 친구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수능은 수능이지.


참고로 난 이제 틀린 것 같다. 매년 수능일 다음 날 올라오는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채점하고 내 가능 범위 대학을 추려보고 하는 놀이를 하곤 했는데 작년부터 못해먹겠더라. 인생을 살면서 존재하는 공부질량보존의 법칙은 시마이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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