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등골은 안녕하신가요
내가 고등학생 때 등골 브레이커는 더플 코트였다. 일명 떡볶이 코트. 가격은 10만 원대. 지금 시대의 10만 원대의 옷은 그리 비싼 느낌도 아니고, 돈 벌고 있는 지금의 나에겐 더더욱 별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것이었지만 90년대 말의 10만 원대는 그 가치가 좀 남달랐다. 게다가 IMF 초읽기에 우수수 망해버린 사업가 대열에 합류한 아버지를 가진 학생이라면 더더욱.
지금이나 그때나 별다를 것 없이 옷 욕심이 없던 나였지만, 그때는 그냥 다들 입고 다니는 그 떡볶이 코트가 몹시도 입고 싶었다. 요즘 아이들처럼 노스페이스를 입지 않는다고 왕따를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냥 눈에 띄게 모두가 그런 코트를 입고 다니니 교복마냥 나도 착용하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고3때를 제외하고 알바를 했던터라 알바비를 모아 사볼까 싶었지만, 당시 알바비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참고서를 사거나 용돈을 하고 나면 그마저도 별로 남는 게 없어 몇 달은 모아야 되지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떡볶이 코트가 입고 싶다라고 말했다. 별로 사 달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이 살았던 터라 엄마는 내가 뭔가 ~싶다라고 한 것에 반응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며칠 뒤 한번 더 말했다. 역시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반 친구에게 들은 것을 말했다. “동대문에 가면 7만 원이면 살 수 있데.” 그제야 엄마는 지갑을 뒤적이더니 “내일 사러 가자.”라고 하셨다.
추운 날씨에 찾은 동대문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반 친구가 말한 7만 원짜리 떡볶이 코트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10만 원이 훌쩍 넘은 가격이었다. '10만 원 넘어도 그냥 좀 사주지'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빈 손으로 돌아왔다. 동대문에서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두 정거장 정도 걸어야 했는데, 걷는 동안 쨍쨍한 해 아래 차가운 바람은 엄마도 얼리고 나도 얼렸다. 집에 와서 보게 된 엄마의 지갑에는 딱 8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2주 뒤, 엄마는 입원을 했다. 수술도 잘 됐고 치료도 잘 됐지만 암은 암이었다. 엄마가 선생님을 그만 둔 이유가 그것이었는지 나는 그때 알았다. 그 후로 떡볶이 코트 같은 건 입고 싶지도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3 졸업 전에 떡볶이 코트를 입어볼 수는 있었다. 대학 합격 축하선물로 받은 것이다. 아마도 그 코트를 6,7년은 입었던 것 같다. 멀쩡했기 때문에 버릴 이유도 없었지만, 왠지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6,7년을 입고 그대로 몇 년을 장롱에서 방치되다가 어느 날 보니 사라져 있었다.
내 등골 브레이커의 기억은 그렇다. 무슨 얼토당토 않은 100만 원짜리 캐나다구스인가 뭔가가 새로운 등골 브레이커로 급부상했다는 이야기에 피식 웃으며 괜히 얼굴을 화끈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