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의 세계를 한 번쯤 통과한 사람을 위해
<초 가구야 공주!>의 이야기 뼈대는 분명 <가구야 공주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원작의 재현이 아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와 그를 배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위치다. 이 애니는 이 오래된 구조를 가상 아이돌과 디지털 세계라는 형태로 다시 꺼내놓는다. 서브컬처 평가를 하려 한다기보다 서브컬처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사람이 그 세계가 커지고, 멀어지고, 결국 개인의 손을 떠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뒤 어떤 상태로 남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초반의 '가구야'는 작고 개인적인 존재다. '이로하'와 '가구야'의 관계는 목표나 갈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함께 있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브컬처가 아직 개인의 언어로 가능하던 시기를 이 둘의 관계로 표현한 셈이다. '하츠네 미쿠'로 비유하자면, '미쿠'가 아직 개인의 플레이리스트 안에 머물던 시절에 가깝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직 관계의 크기를 결정하던 단계다.
하지만 '가구야'가 무대에 서고, 더 많은 시선과 기대를 받게 되면서 관계의 성질은 달라진다. '가구야'는 더 완성되고, 더 멀리 도달한다. 이 변화는 성공의 결과로 처리된다. 문제는 그 성공이 개인의 애정이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이동한다는 데 있다. '이로하'는 그 변화를 막지 않는다. 전통적인 이야기 속 인간처럼 울부짖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이미 '가구야'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세계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함께했던 경험과 기억을 개인의 것으로 접어 넣은 채, 하나의 상태로 남을 뿐이다.
'야치요'는 '가구야' 이후에도 세계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돌아간다는 증거다. '야치요'가 '미쿠'의 디자인과 분위기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쿠' 이후 등장한 수많은 버추얼 아이콘들이 같은 얼굴을 하고도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던 현실과 겹쳐 보인다. 이 때문에 후반부의 "월드 이즈 마인" 공연 장면은 여러 반응을 낳는다. 이 곡은 '미쿠'라는 아이콘이 축적해 온 감정과 기억을 즉각적으로 호출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에게는 강한 향수로, 어떤 관객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그건 '미쿠'라는 존재 때문이 아니라 '미쿠'라는 아이콘이 너무 많은 의미를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에 가깝다. 이 애니는 '미쿠'를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조차 더 이상 개인의 언어로 소유될 수 없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서브컬처가 커지는 것은 막을 수 없고, 아이콘이 신화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때문에 이 애니는 서브컬처를 지키자고 말하지도, 빼앗겼다고 분노하지도 하지 않는다. 서브컬처가 충분히 성장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 이후, 그 세계를 오래 알고 있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자세를 그린다. 지키고 싶지만 지킬 수는 없고, 떠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함께했던 시간과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이 애니가 어떤 사람에게는 밋밋하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다. 이미 한번 어떤 아이콘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 아이콘이 자신의 손을 떠나 변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에게만,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또렷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