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를 너무 믿지 마세요
택시를 탔다.
통화를 하느라 몰랐는데,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반대편 길로 달리고 있었다. 왜 이쪽 방향으로 가냐 물었더니 네비가 그렇게 알려줬다고 하신다. 그러더니 네비 칭찬을 갑자기 격렬하게 하신다. 대충 어떤 길로 가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길은 원래 다니던 길의 두배쯤 돌아가는 길. 기사님께 그렇게 말씀드리자 "일단 가봅시다~"라고 가기 시작하셨다. 기사님이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길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급기야 친구 기사님께 전화해 상황 설명을 하니 스피커폰 상태로 들린 친구 기사님의 목소리. "아! 형! 그 길 엄청 돌아가는 건데!"
그제야 기사님은 사색이 된 목소리로 계속 사과하며 바쁘신 건 아니신지 라고 물으셨다. 바쁜 일은 없어요-라고 하니 원래 요금이 어느 정도 나왔냐 물으셔서 얼마 정도 나왔다 하니까 알겠다라며 요금기를 초기화시키셨다. 그 요금만 받고 꼭 집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기 시작하셨다. "할 일이 없어서 택시를 하게 됐다. 지방에서 올라온 지 2년 정도 됐고 택시는 4월에 시작했는데 솔직히 지리를 잘 모른다. 올해 목표가 서울 지리를 빠삭하게 익히는 거다."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집 근처에 거의 다 왔다. 새벽까지 운전해야 하는데 배가 고프다 하셔서 근처 기사식당이랑 편의점 좌표를 찍어 드렸다.
미안해서라도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다는 걸, 괜찮으니 빨리 가서 식사하시라고 내렸더니 덕담도 해주신다. 풉. 어쩜 그렇게 화도 안 내시고 여유 로우시냐고 고마우시단다. 네. 제가 좀 화도 잘 안 내고 여유롭습니다. 허허.
그리고 사실 시간문제나 요금의 압박이 없어서 그랬는지, 허허 거리며 오래간만에 길거리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며 기분 좋게 드라이브를 해서 좋았다.
기사님의 올해 목표는 아마도 내년까지 이어질 것 같다. 네비를 켜고 달리는데도 두 번이나 길을 잘 못 들어선걸 보면 말이다. 네비, 너무 믿지 마세요 기사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