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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Jun 17. 2016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난 엄마가 아니니까 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아.


조카에게 한글을 가르쳐줄 때나 과외학생이 문제를 잘 풀지 못할 때 나는 그냥 지켜만 본다. 문제를 푸는 스스로가 답답해할 때까지. 정답을 알려주거나 잘못된 것을 수정해주지 않는다. 힌트는 준다. 그러다 애가 닳아 스스로 답을 찾아내면 그제야 그 답을 조금 더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이나 잘 기억하는 방법이나 아까 어떤 점이 잘못되었던 것인지를 알려준다. 미리 답을 알려주고, 답을 향해 이끌어주면 상대는 문제를 푸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자신이 애가 닳아서 하는 것뿐.


왜 그냥 알려주지 않아요?- 왜 시간을 쓰게 만들어요?- 모르는 걸 알면 좀 도와주면 좋잖아요-라는 말들을 듣지만, "이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건 내가 아닌데?"라고 그저 웃어줄 뿐이다. 방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내를 요하는 방법이며, 원망을 들어도 삼켜야 하는 방법이다.


상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헤맬 때도 정확하게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줄만한 것은 드러나지 않게 돕는데,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는 내가 자신을 돕는지 돕지 않는지를 알아도 모르고, 몰라서도 모르고 한다. 그래서 상대는 내게 "내가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왜 돕질 않는 것인가?"라는 원망을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상대를 돕게 되면 상대는 자신의 상황을 더 모를 뿐이더라. 그래서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드러나게 돕지 않는 것뿐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것도 방임하는 것처럼 보여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으며, 나 스스로에게는 인내를 요하게 한다. 


사람 중에는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아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상황이 뭔지, 잘못이 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같은. 그런 성향의 사람은 돕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돕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아니니까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상대를 하나부터 열까지 챙길 필요가 없다. 심지어 말하지 않아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내가 들여다봐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만들어진 오롯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상황에 대한 모든 원망을 내게 던지는, 부작용을 낳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상대방이 좀 더 제대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그런 것인 것을. 그저 담담히 다 집어 삼켜 주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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