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이론 속에 피어난 질투
상실과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치유의 답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스스로를 자꾸만 지옥에 떨어뜨리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이 다시 이 세상으로, 내 곁으로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소년은 래빗홀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평행우주이론 속 다른 세상을 래빗홀을 통해 가는 만화다. 선택지의 길에서 내가 선택한 길 외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의 나는,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만약에"라는 것으로 셀 수 없는 갈래의 또 다른 세상에서 나와 똑같은, 그러나 나와는 다른 나는 그렇게나 많아지는 것이다.
평행우주이론상 또 다른 세상에는, 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기도 하다. 언젠가 꿈을 꿨었다. 나와 똑 닮은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았다. 내가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그 사람은 약간 자라 있었다. 그 둘을 보고 있다 생각했다. '여기는 또 다른 세상인가 보다. 여기에선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잘 크고 있구나. 나랑도 여전히 웃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안도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있는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에 화가 나고, 그 세상에서 그 사람과 웃으며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 질투를 하게 됐다. 생김새부터 목소리, 말투 그 모든 것이 같아도 그 사람은 내가 잃어버린 그 사람이 아님을, 그 사람은 그 사람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소년이 혹여나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까 베카는 소년을 찾아가지만, 소년은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갈 생각에 그런 상처 같은 건 생각도 안 나는가 보다. 베카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버렸다. 자신의 아이는 언제까지나 4살의 아이로만 있는데, 그 소년은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간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언젠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으며 계속해서 삶이라는 것을 살아갈 것이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자신의 아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을 그 소년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베카는 상처받은 자신과 동일시했던 그 소년의 현실을 깨닫고, 사고가 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상실과 상처와 혼란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던 안전장치인 래빗홀이 깨지면서 평행우주이론상 존재하는 세상 따위, 그 세상에 대한 질투 따위 모두 필요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며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터뜨리고 오열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