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불행을 먹고 지금의 우리가 산다
나의 부모님은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결혼하셨고, 1978년에 오빠와 언니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셨다. 그리고 1980년 초, 아버지가 업무차 장기간 해외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몸이 조금 안 좋아져 오빠와 언니를 데리고 광주로 다시 내려오셨다. 그리고 5.18이 터졌다.
계엄군이 내려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집 깊숙한 곳에 어머니를 숨겼다고 했다. 당신께는 어머니가 독녀인 탓도 있었으나 아마도 일제시대와 6.25 등 오랜 난리통을 겪으며 몸에 배어 버린 습관 탓일 것이라고 어머니와 삼촌들은 말씀하셨다. (이따금 듣는 그 시대 때의 외할아버지가 겪으신 파란만장한 일들과 그 일들 뒤에 계신 외할머니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
덕분에 어머니는 총소리와 포소리만 들었을 뿐, 직접적으로 5.18을 겪지는 못했다 하셨다. 삼촌들이 말씀하시길, 길거리는 물론이고 각 건물, 집 할 것 없이 들어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임산부도 거리낌 없이 때리고 찌르고 죽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노출됐을 때 어떤 일이 일었났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귀 뒤에 있는 총으로 짓이겨져 생긴 흉터나 둘째 삼촌의 다리와 허리에 있는 많은 흉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어떤 것으로 표현되거나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걸 직감하게 했었다.
그 난리통이 있고 두 달 뒤에 내가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있었다.
이따금 외가 식구들이 모이면 정말 이따금 5.18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것은 그것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저 전쟁이었다. 그것도 한쪽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전쟁. 그리고 살상.
새 대통령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명필이구나 생각했는데, 그 명필에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가 더해지니 그 감흥을 어쩌지를 못하겠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광주 부심"이라던가, "그만 좀 해라"로 대응하던 사람들은 세월호 이야기에도 "이제 그만 해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만 둘 수가 있을까. 그들이 그만두지 않았음에 지금의 민주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불행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나갈 싹을 틔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