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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May 18. 2017

5.18

그들의 불행을 먹고 지금의 우리가 산다


  나의 부모님은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결혼하셨고, 1978년에 오빠와 언니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셨다. 그리고 1980년 초, 아버지가 업무차 장기간 해외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몸이 조금 안 좋아져 오빠와 언니를 데리고 광주로 다시 내려오셨다. 그리고 5.18이 터졌다.


  계엄군이 내려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집 깊숙한 곳에 어머니를 숨겼다고 했다. 당신께는 어머니가 독녀인 탓도 있었으나 아마도 일제시대와 6.25 등 오랜 난리통을 겪으며 몸에 배어 버린 습관 탓일 것이라고 어머니와 삼촌들은 말씀하셨다. (이따금 듣는 그 시대 때의 외할아버지가 겪으신 파란만장한 일들과 그 일들 뒤에 계신 외할머니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 


  덕분에 어머니는 총소리와 포소리만 들었을 뿐, 직접적으로 5.18을 겪지는 못했다 하셨다. 삼촌들이 말씀하시길, 길거리는 물론이고 각 건물, 집 할 것 없이 들어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임산부도 거리낌 없이 때리고 찌르고 죽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노출됐을 때 어떤 일이 일었났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귀 뒤에 있는 총으로 짓이겨져 생긴 흉터나 둘째 삼촌의 다리와 허리에 있는 많은 흉터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어떤 것으로 표현되거나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걸 직감하게 했었다. 


  그 난리통이 있고 두 달 뒤에 내가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있었다.


  이따금 외가 식구들이 모이면 정말 이따금 5.18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것은 그것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저 전쟁이었다. 그것도 한쪽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전쟁. 그리고 살상. 


  새 대통령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명필이구나 생각했는데, 그 명필에 진정성이 담긴 목소리가 더해지니 그 감흥을 어쩌지를 못하겠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광주 부심"이라던가, "그만 좀 해라"로 대응하던 사람들은 세월호 이야기에도 "이제 그만 해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만 둘 수가 있을까. 그들이 그만두지 않았음에 지금의 민주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불행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나갈 싹을 틔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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