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잇는 건축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인연

by 빵굽는 건축가

‘관계를 잇는 건축가‘


2019년 3월에 후배 건축가에게 반가운 전화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진수입니다.˝
˝응 반가워요. 잘 지내고 있죠?˝
˝네 고양시에 자리 잡은 지 10년이 조금 넘어가네요˝
˝그래요 지금도 건축은 계속하고 있죠?˝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미혼의 젊은이였는데 세월이 이렇게 우리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던 때가 2008년 봄이었으니 지금부터 11년 전에 일입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제가 면접관 역할을 맡고, 인터뷰를 했던 입사 지원자였습니다.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처음 진수 씨를 보았을 때, 제 앞에 앉아서 짖던 표정, 말투, 옷차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첫 만남의 인상과 주변 풍경, 분위기를 그대로 기억하는 인연들이 있습니다. 별걸 다 기억한다고 하겠지만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배경색 같다고 할까요? 기억이 납니다. 덮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긴팔의 군청색 사파리 옷을 입고, 이야기하던 입술 모양, 짙은 눈썹,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을 때 움직이던 눈매, 특유의 몸동작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와는 서천과 서산에서 함께 일을 하고, 경남 하동에서는 일만 만들어 놓은 채 제가 다른 자리로 이동하면서, 그 후로 7년 정도는 전화만 주고받는 사이로 지냈습니다. 진수 씨의 첫째가 딸아이와 같은 나이라서 큰아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곧 태어날 예정이라는 소식과 함께 몇 번의 통화를 하고, 제가 운영하는 건축 현장에도 몇 번 다녀 갔었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몇 년 간격을 두고 한 번씩 만났는데 책장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기억들이 몇 줄 더 추가됩니다.

지난 3월 전화가 왔을 때는, 살고 있는 고양시에 땅을 사고 싶은데 그 땅이 적당한지 법적 조건이나 집을 지을 만한 조건은 어떤지 상의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었습니다. 먼길이지만 반가운 마음에 다녀왔습니다.
구옥이 있던 자리에는 우물터가 있고, 사람의 온기를 비운 지 오래된 집이라 썰렁하지만, 야트막한 경사지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터임을 가늠할 수 있는 두 뼘 넘는 굵기의 밤나무가 서 있습니다. 주변에는 구옥과 새 건물이 몇 채 들어서고, 남향으로 향이 트여 있어 마을의 냄새가 남아 있는 옛 동네였습니다. ‘생활하는 집‘으로서는 손색이 없다는 의견을 주었습니다.
다만 진입로는 다른 집과 공유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구청에서 확인을 하고 토지계약할 때 권리관계를 서류에 명시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2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건축가가 되어 있습니다. 가끔은 업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저의 직함이나 세상 기준의 호칭으로 불러 줄 때 보다 ‘건축가‘라고 불러 줄 때 그 소리와 어감에 이끌립니다.
지난봄에 땅에 다녀오고 8개월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진수 씨의 셋째가 태어나고, 지인들과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지금은 저의 건축주이자, 정확히 말하자면 파트너가 되어있습니다. 코하우징이라고 하죠. 이웃이 있는 동네를 만드는데, 제가 밑그림을 잡고, 입주할 때까지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손윗사람인 저를 끼워준 걸 보면 10년 전 제 잔소리를 다 잊은 듯합니다. 봄, 여름, 가을이 가는 동안 제 동료들이 설계를 마치고, 공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공사는 집주인이자 업자인 진수 씨가 자기 집과 이웃집을 직접 짓기로 하였습니다. 진수 씨가 즐겨 쓰는 말을 소개하자면, ‘개념 있는 업자, 관계를 만드는 건축가‘ 이렇게 불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길어서 그냥 짧게 부릅니다. ‘진수 소장‘

10년 전에 제 집을 지을 때 알게 된 일이 있습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참 설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민스러운 일이죠. 자기의 취향을 요구하는 아내와 타협도 해야 하고, 몇 년 후를 내다볼 기다림도 있어야 합니다. 살면서는 아내의 핀잔도 들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야 돈을 주고 사면 효율적이고 간단하고 고민할 일도 다툼이 생길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건축가라고 불리며 일을 하고 있네요.

공사를 앞두고 진수 소장은 긴장이 되나 봅니다. 겨울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좁은 토지에 여러 세대를 공사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시작되기 전에, 공사비 안내를 해야 하는데, 설명하는 일이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비용 표를 보내주면서 전체적으로 한 번 보아 달라고 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꼼꼼하게 정리를 한 것이 보여서 ˝있는 그대로 안내하면 좋겠어요. 여러 세대를 함께 짓는 일이니 공사비 운영에 틈이 있을 거예요˝ 지난 몇 년간 인건비와 자재비, 에너지 규정, 구조 규정이 강화되면서 소요되는 비용이 그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습니다.

1:100의 그림이, 땅 위에 1:1로 만들어지기까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 마음은 진수 씨가 좋은 건축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수 씨 표현으로는 ‘관계를 잇는 개념 있는 업자‘ 정도가 될 것 같네요
이번 주말에는 정현이네, 소율이네, 윤하네를 만나 다음 일정들을 논의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공사비용은 무리하지 않고 마련할 수 있을지 살짝 염려가 되기는 하네요.

<삶의 질을 높이는 목적에서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생활 보호와 안전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축이 아니라 개방과 유연성이 확보되는 건축이어야 한다._ 야마모토 리켄의 마음을 연결하는 집 중에서>


성사동 세가족.jpg 성사동 세 가족 집 짓기가 시작되고 나서 처음 만들어진 배치 모형. 아주 간략하지만 이 모형만으로도 집주인은 건축가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