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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Dec 31. 2020

지붕 없는 방

작은 여우를 만들면서 

작은 여우를 만들기 위해 참나무를 8조각 내었더니 그 안에 고운 질감의 색이 들어있더군요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의 삶은 나무와 풀, 새들의 소리로 가득한 봄 사이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정원을 만지는 건축가, 시골에 사는 건축가라는 수식어가 더해지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도시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발을 딛고 있는 가까운 장소와 공간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살기에 싫지 않은 소리입니다. 도시에서야 길과 건물, 사람들의 모습이 풍경이라면, 이곳에서는 자연과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이 있습니다. 손과 발, 몸의 크기에 어울리는 정도의 호미, 모종삽, 한 사람 정도 걸을 수 있는 작은 길, 모내기를 앞두고 물을 가둔 논, 사람들의 손길과 자연의 따뜻한 기운이 더해지면서 풍성해지는 고추와 가지, 호박, 참외를 심은 밭,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 그 자체로의 자연은 하루를 24시간으로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순간순간의 변화와 질서, 소리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시골 사는 건축가의 삶이 풍성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골에 살아야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는 이야기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들길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수다스럽게 많은 이야기들을 숨겨놓은 듯한 모양새가 담겨있음을 상상하게 됩니다. 꼼꼼히 보려 하면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이고 살펴보아야 볼 수 있는 꽃들이 가득한 계절입니다. 씨가 열매 표면에 가득 박힌 견과류에 속하는 딸기는 하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우리 집 딸기는 첫해에 모종을 다섯 포기 사다 심은 후로 매년 딸기밭의 크기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딸기가 스스로 성장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딸기는 가을에 포기 나누기를 하는데, 집에 찾아온 지인들에게도 딸기 모종을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흔한 표현처럼 지천에 딸기가 피고 있기 때문에 마음 가는 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딸기꽃이 피면 벌들이 찾아들고, 새들이 날아듭니다. 벌들과 새들도 제가 모르는 뭔가를 우리 밭에 잔뜩 주고 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가을 열무 순을 먹기 위해 뿌린 씨앗이 겨울을 견디고, 텃밭을 갈고 모종을 옮겨 심는 사이 계절에 꽃을 한 가득 피웠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초봄부터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하더니 청보리와 댓구를 이루며 노란 꽃을 한다름 올리고 있습니다. 샛노란 배추꽃와 유채꽃은 지고 있는데 열무 순 옅은 노랑은 아직 한창입니다. 


지난주에 차 한잔 하러 온 이정 원사는 처음 보는 꽃이라면서 이 계절에 이렇게 화사하고 풍성하게 꽃을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하며, 씨를 받아서 꼭 달라고 약속을 받아낼 만큼 정원사에게도 선택받은 노란 꽃입니다. 병아리색은 아니고 옅은 겨자색에 갈색 꽃화분의 열무순 꽃에도 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꽃을 따서 먹어보니 꿀맛보다는 열무 향이 더 가득합니다. 


이제 곧 고추, 토마토, 가지, 상추 모종을 옮겨 심어야 하는데 열무순꽃을 베어내기가 망설여집니다. 이정 원사에게 열무순씨를 주려면 꽃이 지고, 씨앗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씨를 받을 정도만 남기고, 일주일이 더 가기 전에 낫으로 베어 온실 화병에 담아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는 “~할 것 같다”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되더군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뭐하고 그다음은 어떤 일정이고 이렇게 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마당에 핀 풀을 뽑다가도 눈을 돌리면 금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와서 그 일에 빠지고 마니 땅을 밟고 산다는 일은 예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풀을 베다가는 말고, 저녁에 지필 모닥불 준비를 하고 말았습니다. 새로 구입한 손에 들어오는 손도끼로 작은 나무들을 잘라 놓으면 불을 지필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땅바닥에 나무를 세워놓고, 장작을 준비하다 보니 또 금새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그리로 일을 옮깁니다. 마치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색깔이 다른 생각과 몸짓이 이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요? 작은 목각 인형을 거칠게 만들어 봅니다.


언젠가 책에서 본 여우 인형인데, 낫과 톱, 작은 끌, 손망치를 이용해서 지름 10센티 정도의 장작을 8등분 내어 만들 수 있는 나무 인형입니다. 만들어 보고 싶다는 기억에 이끌려 인형을 깎기 시작해 한 시간 정도 다듬었는데 여우가 만들어졌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 우체통에 올려놓고 여우의 인사를 듣습니다. “안녕하세요, 우체부 아저씨 여기에 편지를 올려놓으세요”라고 하네요. 조만간 동네 사람들도 즐거워할 것 같습니다. “지원이 아빠 이건 언제 만든거래요?” 8조각 중 만들고 남은 7조각을 여우로 변신시키는 작업도 남아 있기는 합니다. 언제 8마리의 여우가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계절에는 정말 할 일이 많아서 지루하거나 한가롭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벽과 지붕으로 둘러싸인 곳만 집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의견이기는 합니다. 이정원사가 즐겨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붕 없는 방’ 정원을 두고 하는 말인데 저는 이 말에 열렬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주변에 핀 풀들을 보고 있으면 여러 권의 책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벽과 창, 유리, 지붕 대신 나무와 풀, 함께 사는 고양이, 나무 의자, 모닥불을 필 수 있는 곳들이 또 하나의 방이고 나만의 장소 우리 가족의 장소, 이웃들의 자리라고 시골에 사는 건축가는 이야기하게 되는군요. 비싼 제품의 건축재료와 소품들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지붕 없는 방’에서 오늘도 깜선생은 나무둥치에 발톱을 갈고 있군요.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쓴 윌리엄 코퍼스웨이트는 ‘손으로 만든 장난감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비인간적인 대량 생산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보살핌과 애정에서 나오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특성이라고나 할까.’ 

저도 윌리엄 씨의 이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 삶의 특별한 매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장소에서 나타나는 일이겠지요. 이 계절 지붕 없는 방에서 한동안 살 것 같습니다.    <2020년 5월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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