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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Dec 31. 2020

민들레와 봄소풍

생활의 기술중에 하나

“민들레 캐러 와요, 지금이 제일 좋아, 4월이면 꽃이 피어서 억세고 지금은 꽃이 오르기 전이라 순하고 캐기 좋아요. 어서들 와요. 우리는 하루 종일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시간 될 때 와요”


도농지역인 이곳 안성과 큰 도시에 사는 차이점을 이야기하자면 제가 인식할 수 있는 관계의 수에 있습니다. 여기서 ‘관계의 수’라는 의미는 인사를 주고받는 예의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적으로는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들을 이야기합니다. 집을 나서면 만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 그 옆에 장미마을 식구들, 동네 이장님 댁, 5분 거리에 사는 도예가 형님, 시내로 나가면 백성 교회, 시민모임, 의료생협처럼 얼굴을 보며 반갑게 가족들의 근황을 물을 수 있는 친밀함의 거리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역의 친밀도라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이나 밴드에서 비대면으로 만나는 분들 중에도 고맙고 감사한 인연들이 많지만 수백 명이 넘는 거의 대부분은 저와 인사한 번 나누어본 적이 없는 모르는 분들입니다. 관계의 메커니즘을 진화심리학으로 풀어내는 ‘로빈 던바’는 <던바의 수>에서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수는 150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수’ 보다는 ‘질’이 더 중요한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지역에서 맺은 인연 가운데 한 집을 더 꼽으라고 한다면 포도농사를 짓는 사장님 댁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기운으로 포도농사를 짓고 계시는 분들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  다른 표현이 부족하고 보석 같은 포도를 키워내시는 분들입니다. 포도가 열리는 늦여름과 가을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새순이 올라오는 봄에도 농장에 찾아갈 일이 있습니다. 냉이와 민들레를 캐는 계절이기 때문인데요. 올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올해도 우리 가족은 봄소풍 삼아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포도농장으로 나물을 캐러 다녀왔습니다. 딸아이도 함께 가겠다고 하니 일손이 한 명 더 늘은 셈입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구입해둔 체코 출신의 화가 ‘알폰소 무하’ 전시회 티켓도 쓸모없게 돼버리고 서울 나들이도 기약이 없던 차에 햇살을 찾아 올라온 민들레와 냉이 새순을 따러 오라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봄 햇살처럼 환해지는 마음으로 흙냄새를 맡고 왔습니다. 


딸아이는 민들레 뿌리 냄새를 코로 맡으며 “아 이 냄새 살아나는 것 같아, 좋다”

민들레를 다듬을 때 나오는 하얀 진액으로 새까맣게 변한 손가락을 만지며 “아빠 손가락 색깔이 괜찮은데 촉감도 좋아, 왠지 치유되는 것 같아” 

“여보 내일 아침에는 민들레 무침해서 먹게, 김치를 다 담그기에는 양이 많아서 식초에 매콤하게 무쳐 먹으면 좋겠어”

아내도 나물 무침에 나름 내공이 있으면서도 종종 저에게 반찬 주문을 합니다. 

30대 중반 시절에 사찰 공사를 위해 절에 거주할 때 그곳에 계시는 아주머니들에게 어깨너머로 요리하는 법을 배웠는데, 그때 익힌 생활의 기술 중에 하나가 나물 반찬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고사리, 화살나무, 두릅, 취나물까지 고루고루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제 경험으로는 남편들도 반찬 하는 법을 배워두면 쓸 일이 많아집니다. 이유를 들자면 손수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대접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이 있습니다. 잘 차려진 식당에서 맛있고 좋은 것을 돈을 주고 대접할 수도 있겠지만 나만의 손맛으로 가깝게는 가족들에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찬’을 대접할 수 있는 생활이 하루하루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만듭니다. 실은 반찬 한 가지를 만들기 시작하면 아내와 이웃들의 칭찬에 다른 것도 연구하고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대표 음식으로는 나물반찬과 카레, 죽 종류를 들 수 있고 발효빵을 굽는 일도 연장선상에 있는 셈입니다. 요즘 저의 발효빵은 녹차와 보리싹 가루가 들어간 녹차 보리빵입니다. 제과점에서 먹는 빵의 식감은 아니지만 올리브 오일이나 야채와 곁들여 먹기에 알맞은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빵 맛보다는 빵을 만드는 아빠의 모습을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내는 맛도 좋다고 합니다. 


왼쪽 아래 요즘 만들고 있는 녹차 보리싹 빵, 커피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우리 부부의 커피뿐 아니라 초등 5학년 딸아이의 커피도 없으면 안 됩니다. 애가 커피맛을 알아버렸어요. 가운데는 봄맞이 아빠의 샐러드입니다. 무엇을 만들어 대접한다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에게 대접한다는 의미를 알게 되는 계절입니다.



제 손가락 끝은 하룻밤이 지났어도 여전히 까맣게 물이 들어 있습니다. 민들레 잎은 김치와 나물을 준비하기 위해 뿌리와 분리해서 다듬고 뿌리는 흙을 털어내고 잘 씻어서 물기를 빼고 난 후에 젓가락 굵기 정도로 떡을 썰듯이 잘게 잘라 햇살에 말리고, 바짝 마른 후에는 3번 정도 중불과 약불을 이용해 가며 덖어 놓으면 일 년 내내 봄향이 가득한 민들레차가 만들어집니다. 민들레차는 우리 가족이 여행을 할 때도 먹고, 커피 대신에 애용하는 수제차라고 할 수 있어요.


바쁜 세상에 뭘 그렇게 조물딱 거리며 사냐고 하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지만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이 맛은 돈으로는 느낄 수 없는 수많은 관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도 매년 민들레차를 만들고 있습니다. 

민들레 뿌리는 예로부터 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했으니, 사람들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민초 중에 민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담가 놓은 민들레 뿌리 된장은 식탁에서 쌉쌉하게 절묘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민들레 된장 한 수저에, 냉이와 파를 송송 썰고, 다시마 우린 물에 두부를 썰어 한 냄비 끓이면 된장찌개 맛이 정말 좋습니다. 


‘로빈 던바’씨도 된장국 맛을 알고 있을까요? 된장국 맛은 모르겠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관계의 메커니즘은 이 봄 우리 집 된장국으로 풀어지고 있습니다.   <2020년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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