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달모임. 2020년 2월
매월 한 차례씩 열리는 마을회의에서는 한 달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다음 달에 함께 공유할 내용은 없는지, 마을 청소 당번과 식사 당번은 누구네인지,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이성친구가 생긴 이야기도 귀를 쫑긋하고 만들고, 누구네 집 막내 여동생의 결혼 이야기, 막바지 겨울여행에서 느낀 소감 같은 작은 일상들이 동네 식구들에게는 꽤나 즐거운 이야기들로 다가옵니다. 형제자매보다 더 가까이 살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사도 끈끈이 풀처럼 달고 다니게 됩니다. 새로 시작한 일들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건축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저는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디까지 진행이 되었는지 건축주들은 어떤 성향 인지도, 흉 되지 않을 만큼은 이웃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회의 진행은 마을 회장님이 하고, 기록은 총무가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걱정할 일, 기뻐할 일이 모두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번 달 뜨거운 주제로는 마을길 포장과 마을 녹색화폐 사용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을살이를 한 지 10년이 되어가니 이제 ‘마을화폐’를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지난달, 일요일 아침 차모임에서 나왔고, 이번 달 회의에서 마을화폐의 의미와 사용 가능성을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지역화폐는 공동체가 해체된 곳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우리 동네는 이미 충분하게 서로 협력하고 나누며 사는데 지역화폐가 굳이 필요하겠나?”
“화폐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전히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구는 바빠서 화폐 발행이 어려울 것인데 번거롭게 계량화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대는 아니지만 반론 비슷하게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이쯤 되면 회의를 진행하는 회장님과 총무님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고, 회의 진행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제 귀를 시원하게 뚫어 주는 발언이 있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업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고,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 서비스를 받고 살았다면 지역화폐는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보편적인 상품가치가 아니라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서 얼마의 비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는 ‘지역화폐’와 관계가 없다.”
차분하지만 힘 있게 풀어 나가는 주인공은 제가 늘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는 3호 형님입니다. 흰머리에 차분한 은테 안경을 쓰고 씨익 웃는 모습이 매력인 형님은, 청년 시절에 이곳 안성으로 농촌 봉사활동을 온 의대생이었습니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지역민들에게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는 병원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그렇게 시작된 안성과의 인연은 지난 30여 년간 의료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지역주민이 출자해서 스스로 운영하는 걸출한 병원이 탄생되고, 운영되는 밑거름으로 쓰이고 계신 분입니다. 지금도 의료사회적 협동조합의 의사 선생님으로 계시는 것은 물론 우리 동네 주치의로서 이미 지역화폐를 발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분입니다.
형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그러니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역화폐는 ‘시간’을 기준으로 평가를 한다는 것이죠? 이거 정말 매력이 있네요. 그럼 4호 형님 댁이 여행을 간사이 고양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저는 0호 형님에게 독일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군요. 아주 매력적인 관점이네요.” 저는 형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단 몇 명이라도 좋으니 일단 시작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제 밑 마음속에는 직업의 귀천이 자리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우리들 존재에 위아래가 없어지고 ‘시간’이 소중한 가치로 전환된다는 이야기에 무조건 한 표를 던졌습니다. 몇 차례 의견이 오가고, 준비가 덜 되었으니 지역화폐 논의는 다음 달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습니다.
지역화폐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무엇을 화폐가치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저도 재능이 있더군요. 바로 빵을 구워 배달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우리 가족만을 위한 빵을 굽고, 몇 개 더 구워서 동네에 나누는 정도라면 지역화폐가 시작되면 10집 가운데 한 집이 빵집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빵을 굽고 그 대가로 독일어를 전공하고 번역가로 활동하는 형님께 독일어를 배우고, 앞집 4호 형님에게는 용접 기술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가끔 산에 가서 구들방 땔감 나무도 같이 해보자고 제안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미대생 현이에게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그림으로 담아 달라고 하고 싶어 집니다.
돈이 중심이 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의미는 우리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까요?. 『 석유 종말시계 』를 저술한 크리스토퍼 스나이더는 석유 종말 시대에도 월마트가 살아남으려면 지역 생산물을 선반에 올려야 하고, 우리 삶에 필요한 물건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들이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듣고 있던 녹색화폐, 레츠, 지역화폐가 우리 동네에서 시작하게 되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요? 한 잎, 두 잎, 한두레, 두두레, 한꽃, 두꽃, 생각만 해도 재미나고 의미 있는 화폐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 같습니다. 살면서 어른이 되어 나와 우리들의 관심사를 이렇게 진지하고 즐겁고 흉 되지 않게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고 긴 호흡을 두고 살필 수 있는 동네의 삶이 감사하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