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들에게 '마을'이 주는 의미

카레를 좋아하는 건축가

by 빵굽는 건축가

(2019년 12월 26일)


겨울입니다. 이웃마을 크리스마스이브 행사에 초대받아 다녀왔습니다. 평생 이웃으로 살게 될 정원사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장미가 많아서 장미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인연은 말한 대로 되어가는 것인가요?. 10년 전에 ‘정원이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볼까요?’로 시작한 이야기가 씨앗이 되고, 발아되어 꽃이 피는 마을입니다. 다섯 집 중에 건축가로 일하는 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어 마음이 가까운 곳입니다.


스페인 출장 중에 받은 느낌을 그려 넣은 디자이너의 집, 아빠의 아지트가 집의 중심인 준서네, 소풍날 커다란 나무 아래 모여 이야기 나누는 느낌을 담은 지유네, 이야기가 있는 정원 같은 집, 딸아이의 피아노 선생님 집까지 제각각 색깔이 있는 집들입니다. 앞으로도 여러 집이 함께 할, 어린이들이 많은 동네입니다.


동네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수백 년을 이어가야 가능한 일인데, 기계장비의 발달과 건축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2~3년이면 주택단지가 만들어집니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의식주를 위한 집의 모양은 만들어지되 마을로서의 인문적인 내용은 입주 후에 채워가는 과정이 이전의 전통마을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천 세대의 공동주택이 지어지고 수만 명이 동시에 입주하면서 이웃과 지역의 풍경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경제공동체로서 두레나 품앗이를 함께 하던 자연 발생적인 마을이 아니라 인위적인 주거단지가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필원’의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에서 ‘마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참고할 만합니다. “마을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보자, ‘마을’이라는 말은 집회의 뜻인 ‘모을’ 혹은 ‘모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여 집단으로 거주하고 상부상조의 공동생활을 하는 공간 단위를 예로부터 ‘마을’이라 불러왔다. 마을 공간은 한국인들에게 삶의 틀이 되어왔다.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마을이 급속히 변화, 해체되어 본래의 모습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금 우리들에게 ‘마을’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자기 집을 짓는 동안 배운 것이 많다는 디자이너 집의 1층은 작은 화장실, 씽크대, 작업대가 전부인 열린 공간으로 행사가 있을 때 커뮤니티로 사용되는 장소입니다.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해 동네 아이들이 천정에 풍선을 달고, 색색이 점멸등 트리를 세우고, 기다란 테이블에 준비해온 음식을 차려 놓으니, 참지 못하는 손가락이 음식 맛을 먼저 보게 만드는 정성 가득한 음식점이 되어버렸습니다.


10평 남짓한 장소에 20명이 모이니 제법 행사 분위기가 납니다.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끝나는 시간을 우리가 정할 수 있고, 모두가 주방장인 요리를 꺼내 놓을 때마다, 음식에 담긴 사연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카레는 인도 정통 카레예요. 인도에서 가져온 100% 강황을 넣고, 봉지 카레도 조금 넣었어요. 양파로 맛을 내었죠. 인도 호텔에서 먹어본 맛으로 했어요. 물론 저급 호텔 맛이에요. 인도 고급 호텔은 가보지 못했거든요.”

“3일간 숙성한 도우로 만든 피자인데, 남편이 3일 전부터 정성껏 만들었어요. 저는 몸살이 좀 나서 많이 도와주지는 못했어요. 보기 좋은 피자라 맛도 좋을 거예요”

“무엇을 준비할까 하다가 닭꼬치를 구웠어요. 양념을 준비하고 구워보니, 사 먹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음에 드시고 싶으면 이야기만 하세요. 사다 드릴게요”

이외에도 유부초밥과 약식, 뜨끈한 겨울 어묵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남은 음식은 집집마다 조금씩 나누어 가져 갔습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 같습니다.


준서네 아빠가 섭외한 산타할아버지가 깜찍하게 등장할 때, 아이들은 진짜 산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모른척하고, 칭찬과 선물을 받는 눈치가 있습니다.

아이들 순서에 이어 어른들은 쓰던 물건을 선물로 나누면서 물건에 얽힌 사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나름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물건을 주고받는 동안 이웃집의 ‘라이프스토리’도 듣게 되더군요. 저는 고양이를 많이 기르는 선영이네 엄마에게 <달라이라마의 고양이>를 책 선물로 주었습니다. 지켜보는 관찰자 혹은 주인의 입장이 아닌, 고양이의 시선으로 동거인의 위치에서, 주체가 되어 사람들과 생활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담았다는 소개와 함께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외에도 스타일 펜, 보조배터리, 외국 여행 중에 가져온 스카프, 천연소금, 직접 구운 도자기까지 선물에 얽힌 사연들이 빼곡하더군요.


“지원 아버님! 인도 카레 정말 맛있어요. 카레 장사해도 되겠는데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카레집 하는 게 목표 중에 하나예요. 저랑 같이 하실래요?” 작가이자, 음악가인 하은이 아빠는 지난해까지 김포에 살다가 정원사 아내의 꼬임에 빠져 마당이 있는 이곳으로 내려온 분입니다. 요리사를 해도 빠지지 않을 몸매와 격을 갖춘 하은이 아빠와 제가 카레집을 운영하면 왠지 대박 나겠다는 생각이 스쳐, 같이 하자고 꼬드겼는데 은근히 넘어오더군요. 10년 뒤에 음악가와 건축가가 카레집을 하는 일이 생긴다면 재미날 것 같습니다. 음악, 건축, 카레 왠지 궁합이 맞지 않나요?


선물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일은 한가족이 된 것처럼 남일 같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것일까요?

오래 보면 정이 생긴다는 말이 실감 나는 계절입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일은 우리 동네 크리스마스 행사다”

“아빠 내일은 뭐 할 거야?”

“응 ‘라따뚜이’ 할 거야”

“라따뚜이가 무슨 뜻이야?”

“라따는 쥐, 뚜이는 휘젓고 다닌다. 쥐가 휘젓고 다닌다는 뜻의 음식이래, 영화에도 나오잖아”

“으 이상해 그걸 어떻게 먹어, 쥐가 돌아다닌 걸”


<‘저녁에 엄마는 먹을 만한 게 없어서 안 가고 나랑 아빠만 신양복리에 있는 장미마을 크리스마스 행사에 갔다. 하은이 언니네 유부초밥, 이모네 갈색 약밥, 준서네 아빠 피자, 지유네 아빠가 구운 닭꼬치, 아빠 빵과 인도 카레 등등 여러 가지 음식이 있었다. 음식도 맛있었다. 내일은 우리 마을 크리스마스 행사다. _딸아이가 보아도 좋다고 공개한 다이어리중에서’>


pimg_7184471112398236.jpg "저를 알아도 모른척하세요"라는 산타분장 할아버지의 애드리브에 아이들이 까르륵하고 넘어갑니다. '음식'은 기교가 아니라 '정성'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 분명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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