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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Jan 02. 2021

"도시 친구들은 이런 맛 모르지"

"왼쪽으로 왼쪽"

(2020년 2월 17일에)


결혼하기 전 청년시절 크루즈선을 타고 태평양 여행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항해가 지속되는 동안 수백 명이 탄 배안에서는 다음 기착지까지 수만 가지 색의 바다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그런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한 자구책으로 스스로들 다양한 행사를 열고 모임을 만들면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타 강좌, 영어 강좌, 역사토론, 영화 상영 같은 일들입니다. 그때 저도 빠질 수 없다 싶어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배에는 일본인이 많았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바탕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하니 아무래도 한국어만 가르치는 것은 지루함과 불통의 연속이 될 것 같아 한국어 노래와 몸동작을 가르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보름간 매일 아침 8시에 노래와 율동을 갑판에서 가르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불렀던 노래들이 ‘바위처럼’, ‘백두산으로 찾아가자’였습니다. 율동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우리말도 배우고 지루한 항해에 재미난 몸동작까지 함께 하는 것이 재미났었는지 저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으면 한 배를 탔다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배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함께 할 수 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배를 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선창에 기대어 바닷바람에 머릿결을 가르며,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분위기를 잡는 것도 하루에 한두 시간이면 족합니다. 

마을살이도 이것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긴 건축가 중에 덴마크 건축가인 ‘닐스 한센’은 페리보트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배’라는 것은 집이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살다 보면 우린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춘도 한 참 지나고 봄을 준비하느라 그제는 마당에 마늘을 심었는데 폭설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하루 동안 내렸습니다. 오늘 있을 정기 마을회의 때 대접할 시래기, 미역밥과 강된장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딸아이와 눈썰매를 탔습니다. 

아내 덕분에 딸아이와 산에 올라가 신나게 눈썰매를 타면서 또 하나의 추억을 차곡히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달은 4호 누님 댁과 우리 가족이 식사 당번을 맡았습니다. 


마을 앞산에 오르며 딸아이는 아빠 

“도시 친구들은 이런 맛 모르겠지?, 내가 앞에 앉을게 아빠는 뒤에 앉자”

“응 그럼 조금 더 올라가서 타자. 멀리까지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 거야”


50여 미터 올라간 산길에서 딸아이는 앞에 타고 저는 뒤에 앉았습니다. 이번 겨울 훌쩍 커버린 딸아이는 생각도 행동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딸아이가 저와 이렇게 놀아줄지 모르겠지만 아이와 눈썰매를 원 없이 탈 수 있다니 행복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하고, 흘려버리기도 하는 것을 실감하데 됩니다.  


“왼쪽으로 왼쪽”


걸어 올라가면서도 헉헉 거릴 만큼 경사가 심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급하게 꺾어진 눈길을 내려갈 때는 딸과 함께 몸을 동시에 움직여 주어야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호흡을 맞추어 한 팀을 이룬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지요. 마치 동계올림픽의 봅슬레이를 타는 듯하다고 하면 과장일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의 스릴과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만큼 재미난 눈썰매 타기였습니다. 바지도 다 젖고, 신발에 눈이 하나 가득 들어가고 나니 저의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저의 아버님이 스케이트날이 달린 얼음썰매를 손수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햇빛이 좋은 이른 아침 시간으로 기억이 납니다. 오래되어 낡고 검은 스케이트에서 날만 빼내어 나무합판에 못질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기억이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 지금 딸아이의 나이만 할 때인 것 같네요. 


썰매를 타던 중에 딸아이가 “아빠 언니랑 율이도 오라고 해야겠어”라며 같은 동네 사는 언니랑 친구를 데리러 내려갑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도 또 하나의 추억이 사뿐하게 내리는 눈만큼이나 환하고 부드럽게 쌓여감을 느끼게 되더군요.


동네 아이들이 눈썰매에 동참하면서 저는 아이들에게 더 높은 곳에서 타는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알겠지 여기 경사가 심하고 나가떨어질만한 곳에서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몸을 다 같이 기울여야 해”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몸이 날래고 재바르더군요. 저희들끼리 “왼쪽, 오른쪽 우하하하, 아악 야아 아”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내려가다가 산비탈에 처박힙니다. 그러고도 웃음이 멎지를 않는지 실컷들 웃어대니 그 모습이 보기가 참 좋습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올 때는 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소나무가 많은 숲에서 솔잎 가지에 눈이 많이 쌓이면 나뭇가지가 우지끈하며 부러져 떨어질 수 있으니 유심히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다행히 이번 눈은 바람도 같이 불어서 나무에 눈이 쌓이지를 않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더군요.


독특한 시선으로 일상의 면면을 찾아내는 사진과 창의성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주거 생활자의 개성이 가득한 생활을 기록하는 포토그래퍼이면서 일러스트레이터 토드 셀비(Todd Selby)의 <The Selby House>展 에서 만났던 생활의 기록들이 우리 동네와 우리 집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네요. Todd selby 씨가 우리 동네 모습을 보면서는 뭐라고 할지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이 정도 되지 않을까요 “음 나도 여기 살고 싶군요” 


문화 생활자를 자처하는 아내의 계획에 이끌려 거절할 수 없는 문화생활을 하게 됩니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 만난 기억들이 나네요


서네살에 이 동네에 온 아이들이 이제 중학교에 들어갈 준비들을 하고 있으니 가는 세월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집도 어른들의 웃음도, 마을길도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나무가 자라듯 푸릇푸릇한 싹을 보이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땅 아래에서 이번 봄을 여는 준비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이들이 고맙게 자라주고 있으니 어른들이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마을 식사 당번 역할을 하려면 땡땡이는 이제 그만 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의 강된장 요리는 동네에서 소문이 날 것 같습니다. 표고버섯, 간 감자, 멸치 다진 것, 다시마, 양파, 대파, 아내의 집된장, 달래까지 넣고 푹 끓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아내의 지시에 따라서 척척 보조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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