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세운다

초겨울 기억의 벽

by 빵굽는 건축가

(2019년 12월 17일)


인류 주거의 역사 6,000년 이래로,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거주 장소는 살고 있는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나무와 돌, 흙을 구해 집을 지었습니다. 흙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말리거나 구워서 이용하고, 돌이 흔한 지역에서는 돌집을 짓고, 나무가 흔한 곳은 나무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동 수단과 기계장비의 발전은 다양한 건축재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건축가들에게는 현실 이상의 디자인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건축시장의 논리는 표준화된 재료를 이용하고 정해진 비용과 시간 안에 소비자가 원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주택을 외면할 수 없기에 재료의 공장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갈수록 손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 페인트공, 타일공, 미장공(벽에 시멘트를 바르는 기능공)을 구하기 어렵고, 나무, 돌 재료의 가공은 기계들이 사람을 대체하면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디자인과 평준화된 건축물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 여행보다는 오래된 시골 여행에서 더 많은 소재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장인의 손맛과 생활의 기억들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남 남해의 돌 창고, 제주의 돌담과 민가 주택에서 발걸음과 손가락의 흔적을 만날 수 있고, 한동안 머물었던 목수와 장인들의 호흡을 느껴 보고 싶은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도제수업으로 전수되던 건축기술과 디자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보는 사진 속 풍경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공공건축가를 포함해 많은 건축가들이 ‘Local 재료’를 바탕으로 맥을 이어가고, 거대한 건축보다 '작은 건축'을 지향하는 움직임을 통해 지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건축가 ‘peter zumthor’의 발스온천장, 중국 건축가 ‘li xiaodong’의 마을도서관이 그렇습니다.


집을 짓는 공사의 70%는 벽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으니 ‘벽을 세운다’는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벽과 벽이 만나는 방식에 따라 공간이 생기고, 빛과 바람,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름의 사이(間)들은 칸막이, 복도, 봉당, 창, 툇마루처럼 각각의 역할에 맞게 불리고 있습니다.


<LE MUR>의 저자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의 말을 빌리자면 벽을 세운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 안과 밖을 부여하고, 경계가 만들어지고, 보호해주고, 기억한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석기시대 움집부터 몽골 텐트까지 재료가 무엇이든 수직으로 세워지는 벽은 그런 역할을 해왔습니다. 나무, 벽돌, 유리, 철, 시멘트, 콘크리트는 정체성을 표현하면서도, 바람과 비를 가려주고, 무게를 지탱하면 비로소 재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벽을 위한 다양한 재료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벽돌’을 좋아합니다. 기계에 의지 하지 않고, 두 손으로 들 수 있고, 흙이 있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체적인 생산을 하고 있기에 지역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벽돌의 매력은 검소하고, 따뜻한 흙빛을 띠고 있어, 다른 재료들과도 잘 어울리고, 실내 공간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재료입니다. 그 자체로 풍부한 가능성을 품고, 빛의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을 다양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공품의 흔적을 간직한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돌에 비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이고, 특별한 색상과 모양을 원하지 않는다면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벽돌벽은 광산촌의 관사, 창고,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 성당 같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내외장재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벽돌에서 힌트를 얻은 레고 블록처럼 표준화된 규격은 건축에 자유로운 디자인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눈과 비, 햇살에 강한 내구성 좋은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데 주택을 위한 외벽 재료로는 벽돌만 한 제품을 찾기 어렵다 보니, 괴산과 하남, 안성에 이어서 올해도 고촌리와 성사동에 벽돌을 추천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우리 집도 벽돌집입니다. 고촌리에는 정말 다른 재료를 쓰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건축주가 먼저 ‘빨간 벽돌’을 쓰고 싶다고 하니 막을 수가 없네요. 건축주도 비, 바람, 보수, 견고함을 고민한 결과가 벽돌입니다. 내년에는 다른 재료를 꼭 쓰고 싶습니다.


노출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벽돌과 유리로 외벽을 마감하고, 나무를 사용하는 고촌리 주택 현장에서 벽돌의 크기와 종류, 색을 결정하기 위해 건축주 가족과 시공 소장, 설계자가 함께 모였습니다.

건축주 가족은 도면과 모델로 보던 머릿속의 집이 아닌 1:1 크기의 집을 보니 이제 마무리로 가고 있는 듯하다며 즐거워합니다. 집이 다 지어지기 전에 정원과 경계에 심을 나무이야기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벽과 경계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온 샘입니다.

벽돌을 결정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근처 추어탕집에 가서 뚝배기에 담낀 따뜻한 밥을 한 끼 먹으면서 다음 일정들도 살펴봅니다. 오늘 선택한 빨간 벽돌벽은 가족들에게 어떤 벽으로 남을까요?


제가 추측컨대 ‘초겨울 기억의 벽’으로 남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은 어떤 벽을 기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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