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식당, 우체국, 부추, 해바라기, 기억
(2019년 12월 7일)
연일 이어지는 추운 날씨는 옷장에 있던 옷들도 차례로 나오게 합니다. 푸른 기운들은 사라지고, 따지 않고 남겨둔 홍시를 먹으러 찾아든 새들의 모습이 심심하지 않은 아침 풍경을 만들어주네요.
부추씨 봉투에 “선배님 지난여름에 드셨던 부추 씨앗이에요. 꽃도 드시고 부추도 드시고요. 여러해살이 풀이니 뽑지 마시고 그대로 놓아두시면 다시 올라올 거예요. ps 좋은 작품 활동 계속 보여주시고요”
현장 식구들과 회의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씨앗을 받은 선배는
“씨앗을 받았어요. 지난여름 기억이 나네, 부추꽃도 처음 보았지만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는데 씨앗을 보내주니 너무 고마워. 요즘 일은 어때요?”
“경기가 그런지 올해는 일이 조금 줄었어요, 선배님은요?”
“올해는 다 그런 것 같아요. 잘 견디어 내야지 뭐 ” 웃는 선배의 목소리에는 연륜만큼의 여유가 묻어 있습니다.
씨만 남기고 시든 줄기에서 부추씨를 받고 온실에 두고, 한 달을 말려 그제 종이봉투에 씨를 넣고 실끈으로 묶어서 보내드리고 나니 묵은 숙제를 하나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 집 텃밭에는 부추꽃이 많습니다. 아마도 십몇 년 전 같습니다. 시골 어느 농가에서 난처럼 생긴 줄기에, 하얀 꽃이 피었길래 이쁘기도 하고,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이름을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부추꽃이에요”
집을 짓고 잊지 않고 마당에 부추 씨앗을 뿌렸습니다. 꽃이 좋아 심었는데 해가 갈수록 하얗게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흔하게 피어 소중한지 모를 정도로 많습니다.
부추(garlic chives)는 여러해살이고, 동네에 따라 '정구지', '졸', '솔'이라 부르기도 한다네요. 잎이 길어서 난처럼 보이고, 꽃은 하얀색으로 제눈을 가까이 접안해 살펴보면 여섯 잎으로 이루어진 별처럼 야무진 꽃입니다. 줄기가 길게 올라오면 여름 꽃이 몽글몽글하게 자두 크기만 하게 무리를 지어 피고, 벌과 나비들이 한가득 모여 집 마당에 나비가 가득할 정도로 꽃이 핍니다. 이 정도 되면 부추 향도 땅에서 60센티 정도 높이 위에서, 나비의 날갯짓 덕분인지 은근하게 흘러다닙니다.
새봄부터 오르는 부추 잎은 부추전, 부추김치, 얼큰한 국물용으로 좋습니다. 꽃은 심심풀이로 따서 먹으면, 부추의 향과 꽃꿀이 입안에 퍼질 정도로 싸다 하고 달달한 맛이 혀와 코 아래에 와 닿습니다. 부추 씨앗은 한방에서 약재로 쓰이는 ‘구자’라고 하던데 해마다 씨를 채종해 두었다고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달래, 마늘, 파, 생강과 더불어 ‘오신채’라고 하여 금기시하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에 보내고 있습니다.
일전에 찾아왔던 선배들이 마당에 가득 핀 부추꽃을 이뻐하기에 꽃을 먹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는데, 그 향을 잊을 수 없겠다고 하여 예년보다 많이 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피는 여러해살이 꽃들 중에 씨앗을 받아두는 것은 호박, 부추, 금계국 정도입니다. 꽃사과, 모과, 감나무는 교목으로 한 그루씩 잘 자라고 있으니 따로 채종을 할 필요가 없고, 허브류는 땅과 가깝게 자라는 포복성이기 때문에 차를 마시기 위해 잎을 따는 일은 있어도 씨를 따로 받는 수고로움은 없습니다.
장미, 보리수, 남천도 열매와 씨가 달리는데, 그중에서 보리수는 약지와 새끼손가락 만한 빨갛고 기다란 열매를 만족할 만큼 달고 있습니다. 보리수 열매는 들어오고 나갈 때 따서 먹고, 남는 것은 달여서 잼을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딸기와 보리수는 잼으로 모과는 식초를 만들기 때문에 작은 병들도 많이 필요합니다. 지인들에게 허브와 잼을 나누어 주고 나면 담을 만한 병이 늘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버리지 않고 쌓아두면 언제 가는 쓴다는 생각에 자꾸 쌓아두는 일이 많아집니다. 덕분에 집안과 집 밖에 수납장소도 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입고 있는 옷에 자꾸 주머니를 달아서 이제는 옷보다 주머니가 더 많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애초에 수납장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건축가로서의 전문성에 흠집을 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살아보지 않고 알 수는 없는 일"이라고 적당히 저에게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마음으로 모아두는 마요네즈, 케첩, 소스, 잼류가 담겨있던 빈병들은 다용도실, 주방, 오두막에도 있습니다. 속이 빈 맑은 병들이 1년 치 우리 가족의 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잘 말린 부추 씨앗을 탁탁 쳐서 넓은 종이에 놓고 씨를 받는 중에 깜선생(우리 집 고양이)이 놀아달라고 야옹거려서, 씨앗을 왜 골라내는지 들려주었습니다. “응 지난여름에 오신 선배들에게 씨앗을 보내려고 해, 넌 자주 보고 가끔 먹기도 하는데 선배들은 사 먹어야 하잖아. 좋아하시겠지?”
깜선생은 제 이야기를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머리가 제법 있는 친구여서 의사소통을 한다고 느낄 때가 많거든요. 부추 씨앗을 따로 사려면 꽃씨가 담긴 작은 봉지 크기만 한 것이 이천 원 정도 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채종하고 한 달 정도 말리고, 나누어 담고, 우체국에 들리고, 포장하고, 택배 보내는 일이 번거롭고 신경도 쓰이고, 돈도 드는 일이지만 제가 가진 살림을 나눌 수 있다는 ‘살근한 애정’같은 것을 담을 수 있어 좋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일들입니다.
우편물을 보낼 일은 줄었지만 우체국에는 자주 가는 편입니다. 시내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호수길 고개를 넘기 전에 만나는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작은 시골 우체국입니다. 동네로 들어오는 고개를 넘기 전에 짬뽕집과 나란히 있는 우체국입니다. 시내에서도 찾아오는 '윤정식당'은 중국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간판과 건물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흔하게 보는 빨간 간판에 중국식 지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긴 이 시골에 자금성, 북경반점, 홍콩반점 같은 이름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윤정식당'은 딸아이와 외식을 하러 들리는 곳입니다. 딸아이와 들어가면 얼큰 짬뽕 곱빼기를 한 그릇 시켜서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한 두해 더 지나면 두 그릇을 시켜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주방장 눈치가 보여 안 될 것입니다. 아직은 사장님도 부녀의 알뜰하고 다정한 모습에 눈을 감고 계시기는 합니다. 이사 와서 이런 골짜기에 얼큰한 짜짱, 짬뽕집이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옆에 빨간색 옛날 우체통이 서 있는 우체국도 있어서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윤정식당 건너편에는 예전에 금광초등학교 아이들이 다녔을 문방구로 추측되는 흔적만 남은 토끼탕 집이 있고, 그 맞은편에 우체국이 있습니다. 이사 온 10년 동안 늘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반겨 주시는 두 분의 우체국 아저씨들도 이제 주름이 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오토바이로 우편물을 배달하는 세분의 배달부 아저씨들은 우리 가족과 우리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동네에 사는 둥이와 대발이(반려견들)도 짓지 않을 만큼 익숙한 얼굴들입니다. 가끔은 옆집 형님과 누님의 우편물을 대신 받아 들고 올 만큼 친숙한 사이가 되어있습니다.
우체국에서 부추씨를 꼼꼼하게 포장하고, 테이프로 봉하고, 주소를 적고, 택배를 보낸 지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연락이 왔습니다. 제 손으로 들고 선배의 사무실에 찾아가는 것보다 우편물은 확실히 여운이 있습니다.
“서울에 오면 꼭 들려, 밥 먹읍시다.”
“그래요 선배님 부추씨 값 받으러 갈게요. 서울에 자주 가니 한 번 들리도록 할게요”
씨를 모아 보내주고 나니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지네요. 살면서 전화할 일도 생기고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기분 좋은 뭔가 뿌듯한,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흰빛 아지랑이 같은 것이 올라옵니다.
오래전 이기는 하지만 군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해바라기씨를 가득 모아서 인연 있는 스님께 택배로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래전이라 잊고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저는 꽃씨를 보내주는 일을 즐기고 있었네요. 휴가 나와서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뜰앞에 해바라기를 가리키며 “자네 기억하는가? 지난가을에 자네가 보내 준 꽃씨로 울타리 삼아 봄에 심었는데 보기 좋게 자랐네” 크고 노란 해바라기가 무리를 지어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꽃 그림은 해바라기입니다. 두 해 전부터 우리 집 마당에도 해바라기 꽃이 볕을 따라 피고 있습니다. 스님이 계신 절 울타리에도 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을지, 스님은 잘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한 달 전에 이웃에 사는 정원사 친구가 ‘차이브’와 ‘알리움’을 보내주었습니다. 딸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데 그 편에 보내주더군요. 장미랑 잘 어울리는 구근(알뿌리 화초)을 두 봉지 보내주었습니다. 알뿌리 몇 개이기는 해도, 보내주는 사람의 마음도 느낄 수 있고 겨울이 지나 잊고 있을 때쯤이면 “나 여기 있어요”하는 것처럼 꽃대가 올라올 것입니다. 꽃이 오르면 정원사와 수다를 떨 명분도 생기게 되겠지요. 덕분에 차 한잔 하러 간다고 할 것이고요. 작은 것들이지만 스마트폰의 이미지나 쇼핑몰에서 보내주는 물건들과는 다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살아있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서 할 말도 많고, 가꾸는 동안에도 한참을 두고 이야기할 것 같은 분위기도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