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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Mar 09.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3. 맹인



    어느 여름날 저녁 으스름해져 갈 무렵, 나는 어린이대공원 안에서 약간 언덕진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몇m 앞에 맹인 같은 느낌의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다가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당황한 듯 걸음이 번잡스러워지더니 "여기 호랑이가 지나간다. 00한(못 알아들었다) 호랑이가 지나간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반경 10m 안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고 노인은 통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중얼거림은 그게 다였다.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노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같은 보폭을 유지한 채 그 장소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 불가해한 느낌은 긴 여운을 남겼고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잠기게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그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의 스침이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부터 이루어져야 하는데 나 역시 그런 걸 잘하지 못해 지나치곤 한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한순간의 꿈으로 증발해 버리고 뒤에 남은 나는 이렇듯 시시한 인생을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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