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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Mar 09.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10. 월하리에서 



    내가 뭔지 모를 그것과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그게 귀신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반백 년을 살면서 귀신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귀신은 없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지만 있다고 믿기도 힘들다.

    내 주변에서 각별히 귀신과 썸 타는 관계에 빠져 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귀신 이야기는 그저 책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장치쯤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랬던 내가 태어난 지 50년째 되던 해 봄에 그것을 보았다.

    S시에 있는 모대학교 대학원 기숙사 1호 방에서였다. 우선 나는 <잠결에 난데없는 기미에 놀라 깨어났다>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문장의 사실성 여부는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걸 ‘기미’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또 내가 ‘깨어난’ 것이 틀림없는지에 관해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1인용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등 뒤에 앉아 있다고 느꼈다. 분명히 나 혼자였고 문을 걸어 잠갔던 방이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다해 침대 위를 포복했다. 그러다 나의 의식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높은 곳에서 방안을 샅샅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침대와 침대 사이(1인용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방이었다)를 지나 휘익 달아나는 그것을 보았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알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냥 어떤 검은 실루엣, 혹은 에너지 덩어리라고 말해야 할까. 덩어리라지만 무게나 부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그것이었다. 

    그것은 출입문 근처에서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것과 나 사이에 오고 간 감정에 관해 말한다면, 혹은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는, 혹은 감정에 도달하기 이전의 어떤 차가움, 오래된 냄새 같은 것이 우리 둘 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 그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이 세계에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고 치유도 어려운 수렁 같은 슬픔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아주, 아주 외로운 귀신이라고 보았고 그중에서도 12세 전후의 어린아이 느낌으로 와닿았다. 가장 강력한 것은 그것이 내 몸에서 흘러나왔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아이는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서운해한다고 해야 할까. 모습도 없고 눈도 없었으나 나는 그것이 나를 원망하거나 서운하게 바라보는 눈초리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고 느꼈다. 잠시 후, 아이는 갔고 문은 열리거나 닫히지 않았다. 

    아침에 방안을 서성거리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며칠 뒤 학교 복도에서 나에게 수업을 준 H교수를 만났고 나는 기숙사에서 혼자 자다가 귀신을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H교수는 그 터가 원래 공동묘지자리여서 그럴 수 있겠다며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식이었다. 거기서 잤던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고 했다. 순간 나는 더욱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였고 부랴부랴 H교수와 헤어졌다. 기숙사가 공동묘지 자리였다는 말이 나를 강하게 자극한 것 같았다. 그즈음 나는 우연히 그 근처의 지명이 월하리라는 것까지 알게 된 참이었다.

    이후 나는 한 달가량 깊은 공포 속에 잠식되어 살았다. 자다가 깨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귀신을 만나던 순간이 내 몸에서 반복 체험되었다. 그러면 나는 아주 이상하고 나쁜 세계로 끌려들어가 실컷 매질을 당한 뒤 풀려난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은 이 두 가지 경험이 전혀 별개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숙사 방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미처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친숙한 내 개인 역사의 나타남이지만 지도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나의 개인 역사 위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모함, 손때 묻은 험담이며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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