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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Mar 09.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12. 사별



    방금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는 매우 정정하고 활기찬 양반이셨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오래 병을 앓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은 물론 나 역시 이젠 좀 편해지시겠구나, 한숨을 돌렸지만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정물 같던 할아버지가 있던 풍경 속에 그냥 깃들어버렸던 것 같다. 한 사람이 가면 저절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깃들임.... 사별이 불러오는 노인들의 이런 변화는 불가사의한 데가 있다. 소설의 앞문장이 다음 문장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먼저 가신 한 분이 다른 한 분의 장차 도래할 시간까지 규정해 버리는 일이라니....

    적지 않은 자식, 손자손녀들의 미래를 희망으로 여기면 안 될까요? 하는 것은 논리적인 반응에 불과했던 걸까. 내가 아는 것을 다 동원해도 해석이 안 된다. 


    그래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노인들에게 자식과 손자들은 적당한 걱정거리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당신들 손을 떠나 더 이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식들은 ‘나’가 아니라 우호적인 ‘이웃’에 불과한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도 성격이 완결되면 작가한테도 독자한테도 버림받을 소지를 지니게 된다. 모자라고 결핍된 자식들은 엄마들이 쉽게 놓지 못한다. 부모님을 오래 살게 하려면 약간만, 머리카락 반쪽만큼 모자라는 게 좋고 그 모자람을 그분들 앞에서 밤낮으로 환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ㅜ ㅜ)

    나의 어머니는 여기서 지극히 예외적인데 우리 삼남매가 머리카락 반쪽만큼이 아니라 하늘만큼 땅만큼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모들은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자식을 떼어버리듯 저만치로 밀쳐버린다. 

    그러니 완성되지도 말고 너무 모자라지도 말고 적당한 걱정거리로 남아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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