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밀레니엄 베이비
11월 초였던 것 같다. 뜨개질을 한 땀만 더하면 장편동화가 마무리되는데 너무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서 배수진을 쳤다. 초등학교 5학년 조캐와 그 애의 노는 친구이자 죽고 못 사는 친구 한 명에게 주말에 만나 내가 쓴 장편동화를 같이 읽고 설문에 임해준다면 스파게티와 피자에서 영화 보기로 이어지는 풀코스로 모시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무리를 못하고 기일을 연기하자 이것들이 무지무지 화를 냈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일요일에 놀러 갔더니 조캐와 친구가 배낭을 메고 다이소에 쇼핑하러 간다기에 "어머머머 너네 진짜 웃낀다."고 박장대소했다가 분노를 유발, 급기야 일주일 후에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때 내가 말한 '웃낀다'는 무시가 아니라 맹세코 ‘재미있다’ 혹은 ‘흥미롭다’는 의미의 긍정적 표현이었다. 요즘 애들은 시시하게 소꿉놀이 도구를 사서 ‘어른노릇’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 다이소에 직접 가서 서너 시간을 보내며 물건을 구경하고 쇼핑을 한다.
어쨌거나 할 수 없이 가불해 주는 심정으로 풀코스를 마무리해 주었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며칠 전에야 나는 그 동화를 완성해서 조캐에게 내밀었다. 같이 참여하기로 한 친구는 그 새를 못 참고 먼 곳으로 전학을 가서 가불해 준 돈만 날렸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그제 동화를 다 읽은 조캐가 우리 집으로 들어설 때부터 낌새가 소란스러웠다. 신을 벗고 양손을 마주치며 “아이고.” 어쩌고 추임새를 강하게 넣더니 "난 우리 큰고모가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줄 몰랐네. 아이고... 아이고... 이거 큰고모가 쓴 거 맞어? 너므너므 재미있는 거 있지. 내가 그동안 고모 글 재미없다고 놀린 거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그 순간 알아차렸다. 저것이 '설정' 들어갔구나. 당했다. 역시나 앉혀 놓고 조목조목 검토하고 들어갔더니 개뿔이, 완전히 속이 텅 비었다. 감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끝까지 읽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전에 나온 동화에서는 큰 도움을 받았던지라 이만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2000년 이후 출생한 아이들은 두뇌가 더 진화한 것 같다. 조캐만 하더라도 초딩 저학년 때부터 거짓말에 능통하였고 어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골려먹고 가지고 논다. 공부만이 능사인 어른들 틈에서 어떻게든 자기 방식대로 놀아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난 그다지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그동안 알면서도 당해 주었다. 자세히 보면 자기들끼리는 거짓말을 안 하고 친구도 많고 ‘노브라블럼’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애네 반에 직업탐방 강연 갔다가 아이들 속에서 빛나고 빛나던 조캐의 카리스마와 리더력에 감탄해서 앞으로 더 당해줄 수 있겠다고 너그럽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나 역시 소위 말하는 다른 꼰대들과 한통속으로 치부하며 가지고 놀고, 미리 간파한 정답으로 설정까지 거는 데에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노상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겠나 싶어 어제는 문자를 보내 전학 간 그 친구가 저지른 게 다름 아닌 먹튀임을 야비하게 환기시키며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본격적으로 따져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전화기를 손에 쥐고 사는 녀석이 전화를 안 받다니. 이런 센스, 이런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을 했다. 21세기에도 글을 쓰려면 밀레니엄 베이비들과 맞짱을 떠서 한 번쯤은 이겨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작가인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