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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Mar 14.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18. 복수의 완성



    간호사 두 명이 좀 어두워서 그로테스크 해 보이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 쉬운 걸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한다. 반복은 더더욱 안 한다. 의사도 비슷하다. 환자가 뭘 물어보면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퉁박을 줄 때가 있다. 우리 동네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A외과병원의 모습이다.    

    최근 A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초등학교 6학년 조캐 때문이었다. 신학기 초인 3월 경에 친구와 만나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조캐가 손가락을 다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는 왜 내가 조캐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를 놓아주었다. 

    같은 반 남자아이와 사소한 트러블이 생겼고 서로 떠미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꺾이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조캐가 서럽게 울어대자 담임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라며 퇴교 교치를 내린 모양이었다. 

    A외과에 도착한 나는 이미 아이 둘을 키워본 노하우를 적용해 조캐의 손가락을 관찰했다. 외관은 그럭저럭 무난했고 폈다가 오므리기를 반복하는데도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프다고 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물으면 다 아프다는 거였다.

    내가 관심의 초점을 조캐의 손가락에서 조캐의 마음으로 옮겼을 때 마침 의사가 불러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엑스레이 판독 결과 인대가 약간 늘어났으며 "굳이 소견을 덧붙이자면 타박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의사가 설명했다. 타박상이면 타박상이지 타박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건 뭐지?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으나 조캐는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미진한 게 있어 보였다. 타박상으로 결론이 난 것을 마뜩잖아한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 다툼이 있고 상처를 입었을 때 왜 어른들은 언제나 내가 입은 타격에 못 미치는 판결을 내려 나를 서운하게 하는가. 내 상처를 정확히 지정하고 지칭할 단어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그런 심리를 감안해야만 조캐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고 뒤끝이 없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에고. 손가락이 부러졌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복수가 완성되는데. 그치?” 

    그것은 좋은 드립이었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면을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실제로 내가 조캐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 카스에 올렸을 때 어떤 학부모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 공감을 표시해 주었다.    

  

    저 어렸을 때 친구에게 손등이 물려서 울며 집으로 가던 중 물린 자국이 점점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 치아로 그 자국 위에 한 번 더 상처를 내고 엄마한테 갔는데... ㅋ ㅋ 초등학교 1학년 꼼수를 눈치챘던 엄마한테 된통 혼만 났던 기억이 나네요. 이빨자국 보여주면 누가 그랬냐며 쫓아갈 줄 알았더니만.... ㅜ ㅜ 저도 복수는 못했어요.   

  

    그랬다. 문제는 복수였다. 손가락이 꺾이는 것 같은 충격을 받는 순간 마음이 겪은 모멸감, 거기에 걸맞은 보상이 있어야 했다. 여러 가지 보상의 방법이 있겠지만 그 순간 조캐에게 내려질 최고의 보상은 아마 진단이 아니었을까. 엄마 아빠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게다가 수업을 모두 끝내지도 않고 학교를 나와 병원으로 왔는데 기껏 타박상이라면 다음 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이 좀 궁색하지 않을까. 조카가 정확히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혔을 거라고 짐작해 봤다. 

    피해의 정도를 지칭하는 단어가 크고 끔찍할수록 피해자에게는 위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인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복수라는 단어를 듣고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조캐는 마음이 풀어진 듯했다. 꿍꿍이를 들키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는지 모른다. 

    

    언어로 내려지는 한 어떤 진단도 환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 불합리, 불충분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서러움이다. 문제는 그 서러움을 들키는 순간 복수심도 흐지부지 증발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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