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상순 Mar 15. 2023

내가 여기 있습니다

19. 초대



    권투시합 중계방송을 듣다 보면 해설자가 가끔 초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시합을 하고 있는 선수가 상대 선수를 초대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 경기가 안 풀린다는 식이다. 

    초대란 다른 말로 유인인 셈인데 한 선수가 미리 콘셉트를 잡고 준비해서 기다리는 타이밍인 것이다. 소설로 치면 설정, 즉 각본에 해당한다.   

    

    야구에서도 타자는 오늘은 오른쪽 직구만 치겠다, 오늘은 왼쪽 커버를 치겠다, 하는 계획이 있다고 한다. 그런 계획을 미리 짜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경기를 앞두고 선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습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직구만 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오른쪽 직구를 칠 수 있는 특별한 몸동작을 구사해야 하고 왼쪽 커버를 치겠다는 작정이라면 거기에 맞는 몸동작을 반복적으로 훈련한다. 그렇게 완벽히 준비하고 있다가 기다리던 그게 들어오면 장쾌하게 받아쳐 홈런을 만드는 것이다.      

    경기 당일, 타자가 원하는 공이 날아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운이 좋으면 두서너 번도 가능하겠지만 운이 나쁘면 한 번도 날아오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타자만 콘셉트를 미리 정해 놓는 게 아니라 투수도 그렇다는 것이다. 투수 역시 시합 이전에 그 경기에 관해 많은 그림을 그린다. 모든 것은 선수 각 개인의 특성, 데이터화된 기록에 입각해 정해질 것이다. 여기서 바로 초대의 필요성이 생긴다. 우연이라는, 올 지 말 지한 공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그 공을 치도록 타자를 유인하고 자신이 원하는 공을 투수가 주도록 유인하는 것. 

    이를테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해볼 때까지 해보는 것이다.  

    중계방송을 잠깐만 듣고 있어도 유인구라는 말을 숱하게 듣게 된다. 심지어 타자들은 날아오는 공을 일부러 몸에 맞아 포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일부러 속이기도 하지만 저절로 속이고 저절로 속는 경우도 있다. 규칙과 규칙 사이에는 그만큼 빈 공간이 많다. 그 공간을 열고 또 하나의 공간이 거기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경기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속임수는 규칙의 일부인 것이다. 

    유능한 타자는 직구를 치겠다고 작정하고 나왔지만 직구가 아니라 마치 오른쪽 커버를 치겠다고 작정하고 나온 것처럼 몸놀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투수만 속여서도 안 된다. 투수와 포수와 명령을 내리는 카운터 파워 모두를 동시에 속여야 한다.  

    결정권자가 여럿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유인이 성공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타자가 속는 게 더 쉬운 일 같다. 그는 오늘 오른쪽 직구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투수의 움직임을 눈여겨봤을 때 순간적으로 ‘저 포즈는 커버가 틀림없다.’라고 확신해 자신이 준비해 간 것을 변경시킬 수가 있다. 그것이 적중할 수도 있지만 빗나갈 수도 있다. 안타냐 삼진아웃이냐는 거기서 갈린다. 투수든 타자든 상대에게 반복해 말려들기만 한다면 그는 자기 페이스를 잃고 슬럼프에 빠져 들기 쉽다.   


    그런데 권투에서도 한 선수가 상대방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기다릴 수 있다니. 그는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구사할까.  

    

    상대가 자신이 기다리던 타이밍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거기에 맞는 몸놀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른 것을 노리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아마 발의 위치라든가 발의 움직임이 다를 것 같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초대가 받아들여져 상대가 자신이 연습한 타이밍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그 뒤를 역습하면 된다. 환대는 그렇게 이루어질 것 같다. 선수는 상대가 초대에 응하는 순간 생기는 빈 공간, 거기에 대비하는 연습을 하면서 시합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선수 모두 상대의 초대에 몸을 사리며 경쟁자를 환대하지 않으면 시시한 시합이 되고 만다. 그저 전략과 전략의 복창이 있을 뿐이다. 큰돈을 받고 잔치를 벌였다면 많은 팬들이 실망하고 욕을 먹을 것이다.      

  

    계획과 계획의 기계적인 반복처럼 지루한 경기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여기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