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by 남상순



봄 학기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박사 수료생인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이 얻어걸리는 윤문이나 교정 알바로는 기초 생활비마저 불가능한 실정이고 보면 눈높이를 대폭 낮춰서라도 월급 받는 일을 찾아 나서야겠지만 차일피일 면접 보는 일마저 미룬 채 쓸데없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남몰래 집중하고 있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소설 쓰기였다.

빛나는 강의를 맡기는 했으나 양추자 자리를 빼앗는 모양새로는 아니었다. 희생양이 된 것은 생각지도 못한 D였는데 그를 떨어뜨린 것이 학과장이 아니라 D의 지도 교수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D로 말할 것 같으면 석사 박사 학위 논문 모두가 교내에서 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학회지에 발표한 논문도 호평을 받은 참이어서 다들 의외라며 놀라워했다. 관심은 집중되었지만 어떻게 미운털이 박힌 건지 알아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D가 연락을 끊고 아무도 만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과장이 D를 떨어뜨린 것도 아니고, 학과장과 D의 지도 교수가 앙숙인 걸 감안해 보면 그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어서, 그 일로 인해 빛나가 욕먹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D와 같은 과의 바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다른 짐작을 하고 있었다. H조차도 몇 년 전에 빛나를 우리 집단에서 퇴장하게 만든 계기가 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오히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D였는데 문제는 D 본인은 그 내막의 속성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사오 년 전 가을 무렵, 어렵게 박사 논문을 통과시킨 빛나는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도 받고 성당 일도 겸해서 바그다드로 날아갔는데 하필이면 그때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 괴한들이 그곳 성당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나중에 58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그 사건 한가운데 빛나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어 학과장을 중심으로 비상 연락망이 가동되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전화 등 모든 면에서 취약했던 바그다드 상황 때문에 성당과 집, 학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빛나와 연락을 취할 수 없었고 생사 확인이 어려웠다. 그런데 인질극이 벌어진 지 스무 시간쯤 지나 빛나에게 연락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문자를 받은 사람은 D였다. 젊고 똑똑한 데다 장래가 촉망되기까지 했으나 어떤 면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D는 자기가 직접 받은 개인 문자 메시지를 사진으로 찍어 sns에 곧이곧대로 게시하였다. 간간이 연결되는 인터넷으로 어렵게 보낸 문자인 만큼 내용은 간단했다. ‘네가 걱정할까 봐 보내. 난 무사해.’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 후에 두 번째, 세 번째 문자를 받은 이들은 sns에 게시하기는커녕 자신이 문자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음을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다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고 꿰매고 바느질을 하는 사이 정작 겉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버린 일에 대해서는 무감한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장담한다. 현상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물밑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수습되고 뒤집혔다. 빛나가 유능한 남자애들 몇 명을 물 밑에 가라앉혀 놓고 은밀히 어장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했다. 거기에 빛나에 대한 학과장의 편애가 얹히자 소문은 여러 방향으로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빛나의 꿈은 학과장이 그려 놓은 그림과는 모양이 달랐고 움직임의 패턴도 이질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빛나의 그림은 학과장의 그것보다는 크고 입체적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외로움에 빠트릴 때가 많았지만 그 고독조차도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고집스러움이 빛나의 자존감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기꺼이 품위라며 찬양해 마지않았다. 빛나가 물고기들을 대하는 방식도 물 위에서와 밑에서가 완전히 달라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미세한 뉘앙스를 감지하기 어려웠다. 나는 빛나를 방어하기 위해 빛나를 연구했고 그녀의 sns를 샅샅이 뒤지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파악하였지만 어디에다 발설한 적은 없었다. 아마 당시의 내가 빛나가 몇 명의 남자애들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다고 털어놓았더라도 H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D가 바그다드에서 날아온 빛나의 문자를 공개하자 빛나가 관리하던 어장 속 남자들이 우르르 그물을 빠져나가 도망쳐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어장 안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D만이 천진난만하게 빛나 곁에서 친절을 베풀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장 밖의 물고기가 하는 잉여적인 행동에 불과해서 어느 순간부터 빛나는 못 견디게 염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동안의 공백이 염증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 이상은 나도 잘 몰랐다. 또 D가 가진 순진성이라는 약점이 어떻게 그의 지도교수와 연관되어 있는지는 나도 많이 궁금한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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